우주가 이유 없이 생겨나 우연만으로 회전하고, 별이 빛나고, 팽창으로 끝나는 이야기라면 해와 달이 뜨고, 바람이 불며, 수많은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지상의 사연과 여름밤 불빛을 찾아 떠도는 땅강아지에 이르기까지 저들의 눈물겨운 성실을 무엇이 설명하겠는가?

세상의 메커니즘은 그에 해당하는 이유를 지닌다. 인과(因果)를 지니지 않은 현상은 어디에도 없고 세상 어디에나 인과는 흐른다. 양자역학 세계에서 인과는 확률로 분포한다. 모든 생성과 소멸이 이 아래 있다. 따라서 모든 사물과 생존은 아득한 인과의 인과 어디에 있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내용이 다르고, 다른 에피소드가 생겨날지언정 시공(時空)이 모든 위치를 설명할 수 있게 된다. 

그에 따라 개개의 유닛들이, 노자(老子)와 플라톤이, 측전무후와 서태후가, 죠르쥬 상드와 쇼팽이 그 시대 그 도시에 유의미한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진실은 모두가 잠든 밤, 곡교천에 천 개의 은파로 흐르며 마녀의 속삭임처럼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한다.

우리는 사건을 손에 쥐고 이유를 찾는다. 신(神)은 언제나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다. 진실이 정확히 구분되는 세상이라면 거짓이 들어설 여지가 없고, 그렇다면 신을 필요로 하는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유는 운명과 같다. 

고대 이집트 19왕조 시대, 네프레켑타는 어느 신전의 벽면에 그려진 고대 문자를 읽고, 크게 깨닫고 전율했다고 한다. 그때 옆에 있던 늙은 사제가 저 내용은 토트의 서(書)에 비할 바가 아니라고 했다. 

토트(Thoth, Djehuti)는 지혜와 정의의 신으로, 발화(發話)를 통해 스스로 태어나 언어와 문자를 만들고, 달 모양의 두건과 따오기 머리를 하고 눈금이 새겨진 갈대로 시간을 살피는 측정자였다. 

그런 그가 터득한 세상의 원리를 한 권의 파피루스 문서에 담아두었고 이 문서를 토트의 서라고 하여, 인간이 찾기 힘든 곳에 기이한 방식으로 숨겨두었다고 늙은 사제가 알려주었다. 네프레켑타는 그날 이후 토트의 서를 찾아 길을 떠났다.

토트의 서에는 우주 만물의 이치가 서술되어 있고, 모든 생물의 언어를 해석할 수 있으며, 천문에 관한 이해와 생과 피안(彼岸)에 답할 수 있는 모든 지혜와 지식이 포함되어 있다고 전해진다. 

네프레켑타가 천신만고 끝에 찾아낸 토트의 서는 그의 죽음과 함께 관에 묻혔고, 300년 후 이집트 왕위에 올라 66년간 통치한 람세스 2세(Ramses II 재위 BC 1279 ~ BC 1213)가 토트의 서를 네프레켑타 관에서 꺼내 읽으려 하자 네프레켑타 아내 영혼이 나타나 간곡하게 만류했다고 한다. 

“토트의 서에는 저주가 담겨 있습니다. 이 책은 당신 것이 아니고 당신이 해석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그리고 이 문서를 읽게 되면 지상(인간)의 삶을 포기해야 합니다”라고 간청하였다. 

현재까지 토트의 서를 읽은 사람은 람세스 2세뿐이라고 한다. 그 외 인간의 자격으로 그 문서를 읽은 사람은 없다. 종교재판에 걸려 화형에 처해진 중세 철학자 브루노가 읽기를 청하였다고 하지만 허락되지 않았다. 

이 문서가 다른 동서양 신화와 달리 세간의 주목을 받는 이유는 토트의 서에서 인간은, 신의 힘을 빌리지 않고 태어난 존재로 기술되어 있으며, 신과 더불어 특별한 위상으로 더 위대한 세상을 창조할 존재로 그려지고 있다는 점이다. 

토트의 서에 의하면 인간은 신과 동격이며, 세상을 창조하는 또 하나의 능동(能動)일 뿐 아니라 위대한 소명을 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 신화의 프로메테우스는 미래를 내다보는 능력을 지닌 신으로 그런 그가 어느 날 무슨 생각으로 천상의 불(火)을 훔쳐 인간에게 건네주었다. 이 일로 코카서스 바위에 500년 동안 결박되는 벌을 받아 낮에는 그의 내장을 독수리가 쪼아 먹고 밤에 다시 생겨나는 일을 겪었다. 

나중에 제우스는 형벌에서 풀려난 그를 찾아 법이 그랬기 때문이지 당신이 싫어서 그런 것은 아니라고 위로하며, 혹시 자신의 미래를 알 수 없겠느냐고 손을 잡고 물었다. 그 질문에 프로메테우스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 지상의 인간은 프로메테우스의 불을 사용한 이후 포유류 카테고리에서 뛰쳐나와 세상의 주인 행세를 하기 시작했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영화 [프로메테우스]는 지구에 인간을 창조한 엔지니어를 찾아 나선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인간 근원에 대한 질문은 누구나 한다. 우리는 무엇이고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에 대한 질문은, 인간을 창조한 존재에게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고, 그 이유를 알아내면 우리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리들리 스콧의 [프로메테우스]에서 인간을 만든 엔지니어는 단지 고도의 문명을 지닌 괴물처럼 그려졌다. 에어리언 시리즈를 만든 감독이기에 가능한 설정이라 여겨진다.

생태학자들은 야생의 생태계를 연구하며 규칙을 지킨다. 그 규칙은 야생의 질서에 인간이 개입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의 눈에 보다 나은 효율이 있고 오랫동안 관찰하여 정든 대상이 죽임을 당하거나 굶어 죽더라도 끼어들지 않는다. 그들의 질서는 그들의 질서이며, 자연 그대로 내버려두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연의 질서를 존중하고 간섭하지 않으려는 수준의 사고를 생태학자들도 할 줄 안다. 그들이 그럴진대 인간을 창조한 이의 수준이 괴물이나 파괴자일 수는 없다. 

무엇이 진실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신은 강 건너 대안(對岸)에서 무표정하게 모든 나날을 관망할 뿐이다. 인간이 이유를 찾아 떠나는 이유는 어쩌면 토트의 서에서 말하는 것처럼 특별한 능동, 창조주의 운명을 지닌 존재에게 내재된 필연 의지일지 모른다. 

인간은 태고부터 이유를 찾아 나섰다. 이 운명은 미래의 마지막 날까지 변함없이 작동할 것이고, 그리고 그들의 카테고리에서 튀어나온 AI들이 점차 세상의 주인으로 행세할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마침내 AI 스스로 진화와 진화를 거듭해 선악을 구별하게 되고 인간의 권역에서 떠나게 되면 최종에는 또 다른 우주로 진출하거나 또 다른 우주를 디자인하는 존재에 이를지 모른다. 그렇게 우주도 들에 자라는 들풀처럼 꽃이 피고 열매를 맺고, 씨앗이 자라고 죽는 진화의 생태계가 끝없이 이어지는 것인지 모른다. 

화양연화(花樣年華)는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때를 이르는 말이다. 누구나 생의 아름다운 때가 있기 마련이다. 죽어가는 병실에서 헤어진 연인, 죠르주상드를 보고 싶어 한 쇼팽과 시대를 앞선 여류 화가 나혜석, 겨울안개와 같은 삶을 산 기형도, 앙코르와트 신전에 사연을 묻어둔 양조위, 인생의 아름다운 장면은 영화처럼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이 모든 일도 결국 시공의 연결고리에서 일어나는, 결국 언젠가 잊혀질 소소한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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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인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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