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희망하는 대로 그려지지 않고 잘못된 지난 일을 후회하지 않는 사람은 드물다. 경험을 통해 무엇을 배우는가는 해당 유닛의 지혜에 달렸다. ‘인간’은 무엇보다 다루기 어려운 논제로 심리학자, 사회학자, 예술가 누구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무당은 다른 사람 운명은 잘 맞추면서 스스로 운명은 알지 못한다.

뜻대로 삶을 이루는 유닛은 많지 않다. 누구나 갖가지 착오와 오류를 겪으며 능력과 지혜를 시험받는다. 어떤 노력이나 정성도 통하지 않는 경우도 있고, 터무니없는 행운 또한 있다. 삶에 있어 절대적인, 어떤 경우에도 지켜야 할 무엇이 있다고 믿는 사람은 아직 실상을 목도하지 못한 탓이다. 

1945년 4월 베를린을 점령한 연합군 병사들은 도시 구역마다 눈에 보이는 여자들을 질질 끌고 가 유린하거나 욕정의 도구로 사용했다. 어떤 윤리, 어떤 종교, 어떤 바름도 없었다. 

을사늑약이 체결된 후 조선인의 상당수는 일본 편에 들었고, 일본이 미국에 항복한 후 일본의 많은 처자는 미군을 상대로 몸을 팔았다. 6·25전쟁 이후 한반도에 미군이 주둔하면서 미군을 상대로 한국 처자들도 몸을 팔았다. 더한 짓도 마다하지 않았다. 피해자나 가해자 모두 애써 들춰내려 하지 않는다. 누구의 잘못이냐는 중요한 게 아니다. 부조리는 세상 어디에나 있다. 옳고 그름이 통하느냐 아니냐는 상황이 결정하는 것이지 윤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산스크리트어의 타트바(tattva, 있는 그대로 사물의 참), 혹은 사티야(satya, 실현해야 할 가치의 참)적 진리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가 아니다. 사람은 이야기를 통해 인간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인간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은 각각의 경험에 따라 달라지고, 이를 어떻게 읽고 쓰느냐에 관한 소고는 사회학적 언어로 저술된다. 이 생각이 우리의 생활, 정치, 경제, 문화, 교육 및 사고와 행위 모두를 구체적으로 지시하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은 창조주가 인간을 만들었다고 믿는다. 이 믿음은 세상 어느 것보다 강건하다. 그들은 순교를 택할지언정 거짓에 설 수 없다는 쪽에 줄을 선다. 마르크스는 헤겔의 철학으로부터 역사의 운동량에 개선이나 진보가 내재되어 있다고 추론했다. 그는 사회는 더 나아지는 방향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는 바, 이 원력(原力)이 농경사회에서 봉건주의로, 봉건사회에서 자본주의로 발전했듯 자본주의는 프롤레타리아를 위한 세상, 공산사회로 변화할 것이라 믿었다.

다윈의 진화론과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거의 같은 시기에 나왔다. 1860년대 합리적인 이성주의나 유물론적 환경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면 발화될 수 없는 문건이었고, 나올 수 없는 사상지(思想誌)였다. 

2천년 전 나사렛 예수가 이야기한 바는 지상에서의 삶은 거짓이라는 것이다. 하늘나라가 진짜이며 그 하늘나라에 들어가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하느님이 완전한 것과 같이 너희도 완전해 원수까지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19세기 마르크스는 자본가의 탐욕은 죄나 악, 피도 눈물도 상관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런 지옥에서 노동자들을 구하기 위해서는 만국의 노동자들이여, 증오와 분노를 가슴으로만 그리지 말고 세상에 내놓아야 할 때라고 외치는 광야의 외침이었다.

이성주의자나 현실주의자들은 몽상가와 시인들을 경멸해왔다. 계몽주의의 원천은 전통을 고집하는 이들과 감정적이고 무지한 이들에 대한 경멸에 기초하고 있다. 이것은 참이냐 거짓이냐, 진보냐 보수냐 하는 논조와는 다른 문제다. 세상의 거의 모든 사상과 종교, 철학은 시대에 대한 환멸과 경멸에서 나왔다. 스토아주의나 청교도 정신, 도가·유가를 비롯한 사상의 대부분은 저들이 무지하고 저열하기 때문에 우리가 인도하거나, 우리만이라도 깨끗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나왔다. 

인간이란 이기적이고 더러운 무지렁이들, 도시와 전장에 떠도는 거짓말과 탐욕, 추악한 배신과 사악한 유혹, 이런 것으로 인해 이상적인 바를 실현할 수 없기에 우리가 나설 수밖에 없다고 언명하는 바가 사상이다. 그러므로 자기 해석과 대립하거나 상치되는 관점이나 견해는 적폐로 간주하는 게 대부분의 사상과 종교, 이념이 주장하는 실질적 경계다.

이데올로기는 무서운 것이다. 그 한 가닥으로 인간의 삶 전체가 송두리째 세워지기도 하고 버려지기도 한다. 이데올로기는 신념을 요구하고 의지와 실천을 강요한다. 어느 이데올로기나 선과 악, 좋음과 나쁨을 가르고 그 가운데 선택을 강요했다. 말로는 그래야 세상이 아름다워지고 올바른 질서가 오며, 어울려 사는 새로운 평화가 세워지는 것이라고 했다. 대부분의 사상가는 자신이 참이며 올바른 값을 내놓았다고 증거한다. 나사렛 예수, 마르크스, 싯다르타나 공자, 소크라테스 모두 같은 계열의 사상가들이다. 그들 모두 내면 깊은 곳에 시대와 인간에 대한 환멸과 경멸을 지니고 있었다. 

도시에는 우리가 원하건 원하지 않건 많은 것들이 얽혀 돌아간다. 불안은 곳곳에 흐른다. 고독은 늦은 밤 만취하여 비틀거리는 유닛처럼 위태롭다. 욕망은 프라이팬에 올리브유를 바른 것처럼 번들거리고, 강령은 오래 전 도시가 세워질 때 내려앉았다. 시간은 도시에 쌓이고 설계자들이 구축한 메커니즘이 웅웅 소리를 내며 돌아간다. 소수와 다수는 페르시아 양탄자 무늬처럼 겉면과 뒷면으로 엉켜 서로를 필요로 하면서 애증으로, 또는 배신으로 뒤범벅된다. 그렇게 도시 이야기는 만들어진다. 

늘 따듯한 홍차에 마들렌을 적셔 마시는 행복이라면 투쟁에 발버둥 칠 이유가 없다. 역경과 시련의 지층에 더욱 진취적인 적응이 있고, 더욱 다양한 변종(變種)이 비약적으로 생겨난 것에도 이유가 있다. 우리는 죄와 거짓, 위선과 범죄, 배신과 불신 따위의 목록들을 나쁜 것, 악마적인 것으로 자물쇠를 채워놓은 다음 누구나 미워하도록 가르치고 교육받았다. 

그러나 사회학적 단위의 인간이 거류한 어디에도 거짓과 배신, 범죄가 사라진 적은 없다. 어디든 어떻게든 생겨났다. 천년왕국에서도 마찬가지고, 사찰이나 수도원 역시 마찬가지다. 추악하기는 그들도 못지않다. 악이 그렇게 나쁜 것이라면 지난 수천 년 동안 인간은 무엇을 하고 있었다는 말인가? 하고 니체는 물었다. 

욕망은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이기, 이타 어떤 것도 개의치 않는다. 그렇기에 사기(史記)의 저자 사마천은 과연 이 땅에 하늘의 도(道)가 있는가라고 탄식했다. 이기(利己)와 탐욕과 배신, 많은 이들을 파멸로 몰아넣고도 천수를 누리며 사는 사기꾼과 부모형제를 제 손으로 죽인 악의 배역도 세상의 질서는 마다하지 않는다. 이 모든 강령이 하늘 아래 커다란 덩어리로 반죽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 심리에 악의 원리가 또 하나의 본령으로 그어져 있다. 선악은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없는 분포가 되고, 어느 지평에나 면면히 흐르는 비율이 되며, 언제나 복원되어 행위의 원천이 된다. 선악은 처음부터 하나고 마지막까지 하나다. 

우리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거짓과 배신과 범죄는 사라지지 않는다. 부모나 손자를 걸어두더라도 마찬가지며, 세상의 어떤 올바름, 어떤 위대한 신을 걸어두더라도 마찬가지다. 착한 유닛과 마찬가지로 악한 유닛 또한 세상 끝까지 남는다. 

우리는 자신의 경험으로 세상을 읽고 쓴다. 우리는 스스로를 주인이라 생각하며 살았고, 의지와 욕망의 소유권을 내가 쥐고 있다고 여겼다. 그렇기에 선악을 논할 때 누가 잘못했고, 누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가렸다. 그러나 세상 모든 유(有)는 서로서로 연기(緣起)되어 있다. 존재와 이유는 사슬처럼 연기되어 아득한 곳에서 아득한 곳까지 이어지고, 그로 하여 세상 모든 아침과 함께 만물과 운동이 시작되었다. 이중 어느 하나라도 사슬을 잃어버리면 세상의 유(有)와 무(無)는 인과를 잃어버리며, 인과를 잃어버리면 행위와 존재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게 된다.

아득한 날부터 호모사피엔스는 이 점을 이해하고 싶어 동굴에 그림을 그리고, 영적 존재를 만들고, 신화를 만들고, 하늘나라를 만들고, 문학과 수학과 철학을 만들어 문명 앞에 세워두었다. 선이나 악, 또는 오른쪽과 왼쪽, 종교와 과학, 음악과 문학, 또 아름답거나 추한,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는 이별과 아이들이 영양실조로 죽어가는 상황에도 신념을 놓지 못한 학자와 천년왕국에서도 이루지 못한 약속을 신앙하는 수녀와 한때 사랑했고 미워한 애증의 이름에 이르기까지, 이 모두는 서로 조응하여 이유를 만드는 이야기가 된다. 

누가 누구를 사랑하고 누가 누구를 미워하건 시간은 한곳에 머무는 법이 없고, 섭리에 반(反)하는 질서는 없으며, 진화를 거역하는 생존체는 없다. 세상은 유(有)와 무(無)가 소용돌이치는 시간의 바다. 인간은 생물 연대기에 쌓인 메커니즘이 만들어낸 디자인으로, 그들의 의지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많은 이유가 들어있다. 지난 일을 후회하지 않는 유닛은 드물고 삶은 우리가 희망하는 대로 그려지지 않는다. 누구의 잘못이냐는 중요한 게 아니다. 진실은 모든 것이 끝난 후에야 이유를 드러내는 법이며, 인간의 지혜가 끝나는 곳에 신의 지혜가 시작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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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인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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