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필서예가 림 성 만
문필서예가 림 성 만

길가에 떨어진 나뭇잎, 봄부터 싹을 이어내고, 여름날 모진 폭풍우 견뎌냈지만, 계절의 무거움에 벌레 먹은 채, 하나 둘 나뒹굴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살이도 그런 거 아닐까요. 부모님의 보살핌 속에 자라나서, 또 자식을 키워내 떠나보내는, 벌레 먹은 나뭇잎에도 나름, 구구한 사연 왜 없을까요. 가을이 저만치 떠났습니다. 이젠 추운 겨울입니다. 나뭇잎은 거름이 되어 봄을 기다리고, 우린 푸르른 이파리를 기억하고, 활기찬 시절 속에서 살아갈 겁니다. 봄부터 가을까지 그리고 겨울을, 길가에서 잠시 바람을 마주해봅니다. 떨어진 낙엽은 왜 이리 처연한 건지. 
아침에 창밖의 뒷산이 눈에 들어옵니다. 맑은 겨을 하늘 아래 흰빛 담채가 누리에 깔리는데, 숲은 보되 나무를 못 보고, 나무를 보되 숲은 보지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지만 나무가 모여 숲이 되니 나무를 먼저 보는 것이 사리에 맞는 것이겠지요. 숲에는 큰 나무 작은 나무 모두 어우러져 살아갑니다. 그런데 바람이 불면 가는 몸통의 나무는 뿌리도 흔들리지만, 그러나 굵은 몸통의 나무는 잎새만 흔들립니다. 
큰 나무는 햇빛이나 비를 가려주기도 하고 한 여름엔 땀을 식혀주는 시원한 바람도 모읍니다. 큰 나무하면 그늘 아래 평상을 놓고 쥘부채 흔드는 촌로의 모습이나 멀리 떠나간 낭군을 기다리는 여인의 처연한 눈길도 그려집니다. 갖가지 사연을 품고 있는 큰 나무의 연륜은 또 하나의 산 역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큰 나무가 만드는 그늘에 모이는 사람들에게는 아름다운 향이 나고 작은 그늘에 모인 사람들의 말에서는 험담만이 나옵니다. 큰 나무를 보면 단편소설 ‘큰 바위 얼굴’이 생각나기도 하는데, 큰 바위 얼굴을 보고 자란 소년이 큰 바위 얼굴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지요. 이처럼 우리 옆에 닮고자 하는 그런 큰 바위 얼굴이 있다면 인생의 지표가 될 것입니다. 
세상이 필요로 하는 큰 나무, 그 그늘에 모여 시류를 논하거나 환담을 나눠보는 것은 어떨지. 그러나 아쉬움은, 지금 이 사회엔 그런 큰 나무가 없어 보입니다. 겨울 정취가 절정에 이른 이 아침, 문득 떠오르는 단상을 몇 줄 적어가는데, 겨울은 깊어만 가고 마음의 연못도 깊어가는 사색의 계절, 내가 걸어온 길, 그 길을 더럽히진 않았는지, 닦을 수는 없겠지만 반성의 시간은 잊어야겠지, 붉게 물든 낙엽 힘없이 떨어질지라도, 서럽게 바라보는 것은 아니어라, 흙으로 돌아가 새로운 양분의 흙이 되기에...
클래식 음악계에는 많은 스타 음악가가 존재합니다. 피아니스트, 바이올리니스트, 그리고 성악가... 그러나 음악가 중 최고의 스타, 스타 중의 스타는 아무래도 지휘자가 아닐까 싶습니다. 스타 지휘자들은 지휘자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갖는 동시에 예술감독권을 쥐게 되는데, 예술감독권이란 무엇인가? 연주자들은 세계 유수의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함으로써, 성악가들은 세계적인 오페라 하우스에서 자신의 매력적인 목소리를 과시함으로써 청중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게 되는 겁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연주자와 성악가는 세계적인 명성을 쌓아가는 거죠. 이렇듯 협연자 선정 오페라 배역 결정과 같은 사안을 처리하는 배후 권력자, 그가 바로 예술감독이며, 예술감독은 항상 지휘자였습니다.
오늘 아침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종신 지휘자이며 감독이었던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지휘한 스메타나의 ‘몰다우’를 들으면서 하루를 시작해봅니다. 고즈넉한 십일월의 첫 휴일, 며칠 동안 밀린 작업에 지친 몸을 다독이는 이 시간이 저에게는 정말 편안한 시간인 거죠. 혼돈의 삶에 한참 동안 헤쳐나오지 못했던 무수한 시간들, 돌이켜보면 앞만 보고 달려왔지만 이젠 나를 위한 시간을 갖으려 합니다. 
기억해보면 자유와 민주화를 위해 외쳐 보았지만 진정 자유와 민주화는 이루어졌는가. 청년시절 민주화 운동의 물결 속에서 외침으로 살았던 시절들, 후회는 없지만 정신적으로 피폐했던 것을 잊지 못하는 것을 이해하실지. 충만하지 못했던 삶의 기억이지만 그땐 제게 최선이었습니다. 사랑하고, 아이를 키우고, 또 사랑하고 내면을 건강하게 키우면서 가시덤풀을 헤쳐왔지만 세상은 만만치 않았죠. 하긴, 그게 인생살이인 것을 몰랐던 것은 아니지만, 왜 저라고 편한 길을 택할 줄 몰랐을까요. 하지만 아직도 견디는 건 ‘양심’이라는 두 글자를 생각하면 가슴이 뜨거우면서도 아린 것을 어찌하겠습니까.
이 겨울은 누가 뭐라고 해도 국화차 한 잔입니다. 국화는 가을의 대표적인 상징인데, 어느 분이 국화 말린 것이라면서 선물하더군요. 입차 한 통까지. 아직 물 끓여보진 못했지만 행해 보렵니다. 그 분을 생각하면서, 때론 눈물이 나올 때가 있습니다. 그냥 눈물이 흐를 땐 다른 말은 필요 없는 거죠. 물론 설명도 필요 없습니다. 이 모든 게 낙엽 지는 가을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이 글 적으면서도 제겐 정말 가을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센티멘탈, 뭐 그런 거 아니더라도 세상엔 나 아닌 또 다른 세상이 기다리는데 우린 그것을 쫓아서 가는 게 아닐까요.
한 사람을 기억한다는 것, 쉽진 않지만 정신적 책임감이 아닐까요. 남쪽 땅에서 사는 사람을 기억한다는 것, 그건 어찌보면 행복입니다. 또 다른 면에서는 고통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사랑하고 존중하고 이해하는 것, 물론 쉽진 않지만 그럼에도 눈에 아른거리는 것은 존중이며 사랑이 아닐까요. ‘현실을 직시하라’ 그 말 또한 무시하지 않겠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것을 부정한다면 아픔이 다가오는 건데, 정말 존중해야겠지요. 현실은 냉정합니다. 그것을 이해 못하는 것도 아니지만, 그럼에도 내겐 거짓 없는 이 시간이 행복하다면 이율배반적인 것일까요. 어떨 땐 문장도 길어져 아프다 못해 속상함입니다. 이 모든 게 겨울 때문이라고 말한다면 공감하실지. 많은 것이 스쳐 지나가는 이 겨울 곱게 맞으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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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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