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필서예가 림성만
▲ 문필서예가 림성만

「실존주의의 뮤즈가 되다」
아마도 사르트르는 그레코를 실존주의의 문화적 트레이드 마크로 설계한 듯하다. 그레코에게 노랫말을 주었고, 이미 자끄 프레베르의 시 ‘고엽(Les Feuilles Mortes)’을 샹송으로 만들어 명성을 얻은 작곡가 조셉 코스마에게 그레코를 키워달라고 부탁했다. 그레코는 악보도 볼 줄 몰랐으나 일주일간 지도를 받아 작가 레몽 쿠노의 시에 조셉 코스마가 곡을 붙인 ‘그렇게 생각해도(Si Tu T’imagine)‘를 가지고 ’지붕 위의 황소‘라는 카바레에서 데뷔했는데, 이 역시 생제르망에 생겨난 카바레다.
그레코가 사르트르를 비롯한 철학자, 문인들이 지은 시로 샹송을 부르자 “생제르망 데 프레에 실존주의 뮤즈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돌았다. 젊은 지성들은 이 뮤즈를 보기 위해 생제르망을 찾아왔고, 소녀들은 그레코의 의상을 따라 입었다. 그레코는 전후 패션 아이콘이자 실존주의 철학의 음악적 메신저로 떠올랐으며, 시작은 시간당 5프랑씩 받는 무명가수였으나 이제 세계적인 가수로 성장하는 것은 시간문제가 되었다.
그 무렵, 그러니까 1946년부터 50년까지 그레코는 생제르망에서 노래를 부르고 철학토론에 참여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자끄 프레베르, 사르트르, 프랑스와 모리악 등 대작가들이 그레코의 노랫말을 지었고, 자끄 브렐, 조르즈 브라쌍, 조셉 코스마 같은 최고 작곡가들이 곡을 만들었다. 그레코의 노래는 마치 시를 낭송하는 듯한 느낌인데, 프랑스어 발음이 탁월했고 단어들의 뉘앙스를 잘 살렸다. 노랫말에는 새로운 시대, 새로운 삶을 향한 철학적 메시지, 파리의 사랑, 자유·개성·민주주의·인권 등의 이상적 가치들이 담겨 있었다. 
그레코는 전통적인 종교 관념이나 윤리의 감옥에서 뛰쳐나와 개인의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고, 현실의 이런저런 문제들을 끌어안고 고민하며 삶을 개척해나가는 ’생제르망 정신의 완벽한 구현자‘가 되었다. 줄리엣 그레코는 에디트 피아프와 함께 전후 프랑스 여류 샹송의 양대산맥이 되었는데, 그레코가 일으킨 산맥은 예술과 지성의 천국이라고 했던 생제르망에서 흘러나왔고, 그래서 그레코는 지금도 ’생제르망의 여왕‘으로 불린다.

「생제르망에 꽃핀 사랑」

▲ 1960년대의 줄리엣 그레코, 현존했던 샹송의 전설
▲ 1960년대의 줄리엣 그레코, 현존했던 샹송의 전설


생제르망 시절, 그레코는 숱한 남자들을 매료시켰다. 자신은 전혀 의식하지 않았고 그럴 생각도 없었다고 했지만 마치 자석처럼 남자들을 끌어당겼다. 세르주 갱스부르와 염문에 빠졌고, 친구이자 연이었던 마일스 데이비스와 오손 웰스는 청혼까지 해왔다. 걸출했던 철학자 메를로 퐁티(현상학)도 그레코에게 빠져 청혼했었다. 그밖에도 ’한 다발‘의 남자들이 그레코를 향한 상사병을 앓았고 몇몇은 자살하기도 했다. 여기에서 마일스 데이비스와의 사랑은 기억할만하다. 
그는 당대 최고의 트럼펫 연주자이자 작곡가로서 재즈 전성시대를 주도했던 천재였지만 흑인이었기에 미국에서 멸시와 냉대를 피해갈 수 없었다. 보리스 비앙의 권유로 자유의 도시 파리에 들어온 그는 샹송을 재즈로 편곡, 불멸의 연주들을 남겼고 파리를 거점으로 삼아 유럽의 여러 도시에서 공연을 했으며, 그의 생애 가장 빛나던 한때를 파리 생제르망의 ’타부‘라는 클럽에서 보냈다. 
그는 그레코와 친구이자 연인으로 지냈다. 서로 잘 맞는 남녀를 지켜보던 사르트르는 그들에게 “왜 결혼을 하지 않느냐?”고 묻기도 했다. 마일스는 그레코에게 청혼을 했다가 포기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만, 우리가 결혼하면 당신은 미국에서 검둥이에게 몸을 판 여자로 낙인찍히게 되고, 그건 당신의 커리어에 치명타가 될 것이다.” 마일스가 미국으로 돌아간 뒤에도 두 사람은 마일스가 죽을 때까지 친구 관계를 유지했다. 세 번째 남편과 살고 있는 그레코는 후에 마일스를 가리켜 자기가 만난 사람 중에 가장 훌륭한 남자였다고 말한다.

「모두 사라지고 그레코만 홀로 남아」

▲ 사르트르와 보부아르 부부줄리엣 그레코를 ‘실존주의의 뮤즈’로 만든 은인이자 후견인이었다.
▲ 사르트르와 보부아르 부부줄리엣 그레코를 ‘실존주의의 뮤즈’로 만든 은인이자 후견인이었다.


그레코가 실존주의 뮤즈로 활약하던 재즈 클럽, 생제르망 도핀 거리의 지하 술집 ’타부‘는 오래가지 못했다. 밤새 소음에 시달리던 주민들의 거센 항의를 받아 문을 닫아야 했다. 그러나 빛나던 한때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의 열망에 힘입어 이 술집은 다시 문을 열게 되는데, 본래 그 자리에, 처음 창업했을 때의 이름인 ’카페 로랑(Lauret)’으로 간판을 바꿔달고 손님들을 부르고 있는데, 전과 다름없이 주로 재즈공연이 열리는데, 매주 수요일 저녁에는 샹송공연이 마련된다.
생제르망 데 프레의 여왕 줄리엣 그레코는 나이가 벌써 100세 가까웠지만 10년 전만 해도 파리의 유명한 극장 ‘올랭피아’에서 공연을 했다. 새 음반도 발표했는데, 자료를 뒤져보니 뇌브메종이라는 도시의 문화센터 공연을 시작으로, 투어가 이루어졌으니, 여전히 현역으로 활약했던 세계의 몇 안 남은 아티스트였다. 그레코는 문자 그대로 샹송의 살아있는 전설!
그 시절 그레코의 친구들은 모두 세상을 떠났다. 그레코의 마당이었던 생제르망 데 프레도 옛날 같진 않다. 그래도, 가서 보면 기록으로 본 옛 분위기가 꽤 남아 있다. 그 시절의 카페와 비스트로 브라브리(식당) 등은 여전히 건재하다. 아직도 인근 대학의 철학교수들과 작가, 화가들, 세계의 유명인들이 생제르망 골목길을 어슬렁거리는데, 생제르망에 가면 사상과 문화의 창작소, 파리의 진수를 만날 수 있다. 생제르망의 역사를 만들었던 카페들, 사르트르·보부아르와 프랑스 대혁명기의 철학자들과 줄리엣 그레코의 추억이 숨 쉬는 곳, 가을이 깊어지면 그레코의 음성이 더욱더 간절해진다. 

SNS 기사보내기
태안미래
저작권자 © 태안미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