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동남소방서 오경진 서장
천안동남소방서 오경진 서장

백화산에서 보는 옛날 내 추억의 길들 중에서 가장 명확하게 보이는 길은 “장명수”라는 바다로 가는 길이다. 장명수에는 태안 읍내의 남쪽 변두리 마을인 ‘환동’ 너머 ‘구실’ 마을을 거쳐서 가는 길이 있고, ‘아맹이고개’ 넘어 남산리를 거쳐서 가는 찻길이 있지만, 내 추억의 길은 찻길이 아닌 산모롱이 길이다.
장명수는 태안 읍내에서 가장 가까운 바다다. 옛날에는 가장 가까운 바다가 아니었지만, 일제 시대 이후로는 가장 손쉽게 갈 수 있는 바다가 되었다. 육지로 움푹 파고 들어온 바다 제방의 이쪽 너머에는 갈대밭이 있고, 그 너머에는 갯물 저수지와 넓은 염전이 있다. 또 염전 너머에는 논들이 펼쳐져 있는데, 그 논들의 한 옆으로는 세 개의 산모롱이가 거의 일정한 간격으로 동무하고 있다.
태안읍 남산 3리에서 근흥면 안기리 방향으로 도로가 나있고, 삼거리에 정자가 지어져 있다. 장명수는 태안 8경에 들 만큼 경치가 빼어난 곳으로 북쪽으로 등자산이 둘러있고, 남쪽으로는 용뿌리산이 솟아 있다. 일제강점기에 용뿌리산의 흙을 파서 장명수 일대에 원을 막았는데, 공사가 시작되고 산에서 흙을 파가려고 하자 땅속에서 붉은 피가 솟구쳐 올라 이를 심상치 않게 여긴 일본인들은 산의 혈을 끊기 위해 정상에 쇠말뚝을 박았다고 한다.
장명수는 일제강점기 이전에 붙여진 지명으로 남산 3리의 고삼종 옹은 장명수 전설을 다음과 같이 들려 주었다.
그 내용은 ‘장자못 설화’와 비슷하다. 옛날 마을에 장명수라는 사람이 살았으며, 그는 등자산 아래에 기와집을 짓고 부자로 떵떵거리며 잘 살면서 하나 뿐인 아들이 나이가 들어 결혼을 하였다.
며느리는 성품이 착하고 매우 성실하였으나 장명수는 밥만 먹으면 나가서 원을 막았다. 땅을 한 평이라도 더 늘리기 위해서 욕심을 부린 것이다.
며느리가 시집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스님 한 분이 누추한 차림으로 등에 바랑을 지고 대문으로 들어왔다. 마침 장명수는 아들·며느리와 소여물을 작두로 썰고 있었다.
스님은 “시주 좀 해주시오” 말을 건넸으나 장명수는 그 말에 아랑곳 하지 않고 “이 흉년에 너 줄게 있겠느냐” 하며 소여물을 바랑 안에 넣어 주었다. 스님은 각박한 인심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문을 나섰다.
이를 지켜본 며느리가 못내 마음을 졸이다가 살그머니 뒷문으로 나가서 스님께 쌀 1됫박을 바랑에 넣어 드렸다. 그러자 스님이 조금 있으면 큰일이 일어날 터이니 절대로 되돌아 보지 말고 왔던 길을 따라 나를 쫓아오라고 이르는 것이었다.
며느리는 정든 집을 떠나려니 선뜻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스님의 말씀을 따라야 할 것 같아서 그 뒤를 쫓았다. 한참을 따라 가다가 그래도 살던 집과 가족들 생각에 주춤하여 뒤를 돌아 보았다.
남편과 시아버지는 여전히 여물을 썰고 있었으나 며느리가 뒤를 돌아보는 순간 천지사방이 물바다로 변했다.
바닷물이 집을 집어삼키고, 하늘에서는 천둥번개가 내리쳤으며, 장명수가 오랫동안 공들여 막았던 원도 여름날 봇물 터지듯 터져 버렸다.
물은 계속 불어나서 스님과 며느리가 있는 곳까지 왔으며 며느리도 결국 물에 휩쓸려 떠내려 갔다.
스님의 말을 어긴 며느리는 목숨을 잃었고, 시신은 개울을 따라 흘러가서 바닷가의 바위가 되었고다고 한다. 
마을사람들은 이 바위을 ‘각시바위’라고 하며 며느리가 스님의 말을 따랐더라면 어쩌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고 입을 모았다.   
또한 망부석 설화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이야기다. 절개 굳은 아내가 먼 타향이나 다른 나라에 나간 남편을 고갯마루에서 오랜 기간 기다리다가 끝내 돌아오지 않자, 기다림에 지쳐 돌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대표적인 것은 신라시대 박제상의 아내와 백제 정읍사에 얽힌 망부석 전설이다. 전자는 박제상의 아내가 일본에 사자로 간 남편을 치술령에서 기다리고 기다리다 지쳐 죽어서 망부석이 되었다는 이야기며, 후자는 백제 가요 정읍사와 관련된 설화로, 행상 나간 남편이 돌아오지 않으므로, 높은 산에 올라 먼 곳을 바라보며 기다리다가 망부석이 되었다는 전설이다.
옛날 선비 한 명이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가던 중이었다. 그는 신촌동에 있는 목화밭에서 목화를 따고 있는 아름다운 아가씨를 보게 되었다. 그 아가씨도 그를 보고는 첫눈에 반해 사모하게 되었다. 둘은 훗날 결혼하기로 약속하고 선비는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떠났다. 그런데 과거일이 한참 지나고 해를 넘겨도 선비는 돌아오지 않았다.처녀는 기다림에 지쳐서 그만 그곳에서 망부석이 되고 말았다. 
그 후 선비는 열심히 공부해서 과거에 급제하고 처녀와의 재회를 그리며 그곳에 왔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고 말았다. 망부석을 본 선비 또한 후회와 애모의 정에 사무쳐 그 자리에서 돌이 되었다.
태안읍 남산리를 가운데 놓고 근흥면 두야리, 안기리와 남면 진산리 사이로 움푹 들어와 있는 장명수는 아늑하고도 한적한 바다로 가을 망둥이 낚시철을 제외하고는 사람 보기도 어렵다. 가끔 갯지렁이를 잡는 아낙네들과 머리카락 같은 장어새끼를 건지는 두어 사람을 보기도 하지만,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는 날이 더 많다. 또 바닷물이 차 있는 날보다 물이 들지 않아서 갯벌이 황막하게 드러나 있는 날이 더 많다. 그래도 대백로와 중백로, 왜가리, 갈매기, 큰물떼새와 작은 물떼새들은 늘 있다. 밀물이 들 때는 여기저기에서 뛰어오르는 숭어를 볼 수 있다. 잘못 뛰어올랐다가 물 밖으로 떨어진 탓에 목숨을 잃은 숭어를 보며 혀를 차는 경우도 있다.모래톱을 밟기도 하고, 자갈밭이나 갯바위 사이를 걷기도 하고, 제방 길을 걷기도 하며 왕복 2시간 정도 해변을 유람하는 일을 거의 매일 반복하건만 전혀 싫증이 나지 않으며, 간혹 해변 모래톱에 1미터 길이의 고래새끼 사체가 누워있는 것을 보았다.
해변에 차를 놓고 갯바람을 맞을 때마다 절로 힘이 난다. 옛 시절의 추억들도 함초롬히 어려 있는 장명수 해변을 가까이 두고 사는 것에 늘 감사하는 마음이다.
우리가 지금 글공부를 하는 것은 마음공부를 하기 위해서다. 죽은 고래새끼를 보았을 때 고래새끼 하나가 죽어 있구나라는 생각만 해서는 안 된다. 또 왜 죽었을까?라는 궁금증만으로 머물러서도 안 된다. 이 새끼고래와 헤어진 어미고래는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새끼를 잃은 지금 그 어미는 어떤 심정일까? 이런 생각도 해야 한다. 
1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리고 나는 다시 장명수 해변에서 고래 새끼 사체를 보았다. 불현듯 10여년 전의 일이 아롱아롱 떠올랐다. 
까닭 모를 그리움과 슬픔이 솟구 치더니 눈물이 핑 돌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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