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안소방서 오경진 서장
▲ 태안소방서 오경진 서장

지난 17일 2023. 태안 K-마린 노르딕 워킹대회가 몽산포·달산포·청포대 일원에서 개최되어 하프코스(4km) 참가하여 천혜의 자연이 주는 아름다움을 만끽하였다
태안은 해양치유 선도하는 지방자치단체로 달산포에 해양치유센터가 내년에 완공되면 해수, 해조류, 머드 등 해양자원을 활용한 재활, 질병예방에 효과적인 테라피실 운영과 해양치유 전문인력 양성, 해양치유 자원관리 등 해양치유 산업을 통괄하는 역할을 수행하게된다.
거아도는 남면에 위치한 작은 보섬으로 몽대포구에서 서남쪽으로 약 10㎞ 정도의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거아도 뒤편에 부속도서로서 삼도(三島)와 울미도(蔚美島), 지치도(知致島), 묘도(卯島)등이 있다.
면적은 0.74㎢, 해안선 길이 약 6㎞로  거아도의 본래 지명은 거울(鏡)섬으로 맑고 아름답다 하여 붙여진 지명같이 거아도의 남봉(南峰)에서 내려다본 바다는 깨끗함은 물론 산과 어우러진 바위 그림자가 더어울린 절경을 이루고 있다.
이 섬은 일제강점기 초부터 일본의 옛 수도인 경도(京都)와 일본어 발음이 같다고 한 말이 있은후, 아이가 어른보다 많이 사는 섬이라는 이유로 1914년에는 거아도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거아도라고 부르는 전설을 소개하면 중국 진나라의 시황제가 아방궁을 짓고 서복으로 하여금 불사약을 구하도록 명하였다. 
서복은 선남선녀(善男善女) 500명을 싣고 삼신산인 한라산으로 행해하던 중 달빛에 비친 아름다운 거아도에 유혹되어 정박하게 되었다.
맑고 깨끗한 거아도에는 불로초가 자생하리라 믿고 선남선녀 한쌍을 하선시켜 불로초를 구하도록 하였다.
그들은 거아도에서 불로초를 구하였으나 약속한 서복의 배는 돌아오지 않아 할 수 없이 불로초를 먹어 버렸다.
그래서 거아도는 늙지않는 젊은 남녀가 오랫동안 살고 있으므로 행해하던 선원들이 거아도로 불렀다고 전해진다.
거아도는 걸인이 북쪽을 향하여 걸어가는 형국이므로 평생 빈곤을 면할 길이 없는 섬이라 하였으나 상공에서 내려다 보면 북쪽의 바로섬(直島)이 삿갓을 쓴 머리, 그리고 중앙의 본섬이 몸체, 남봉(南峰)이 바랑으로 보일 수 있다.
만일 덩치가 큰 바랑격인 남봉의 큰 봉우리와 머리격인 바로섬이 바꿔졌으며 여름철의 서남풍과 가을·겨울철의 북풍을 막았을 것이다.
그렇게 되었다면 자연 항해하는 선박의 피항처와 어업의 중심지가 될 방파제 구실을 충분히 하여 어항으로서 큰 몫을 하였다.
거아도의 큰마을 앞에 600년생의 팽나무가 7~8주 있는데 그 중에 큰나무 밑에는 오랫동안 탑 할머니라고 모시는 바위를 모셔 제를 지냈고 그 반대편에는 탑 할아버지가 있는데 탑할아버지에 대해서는 큰 이야기가 없지만 탑 할머니는 큰나무밑에 돌도 많이 쌓여 있었다.
탑할머니 바위는 꼭 할머니가 앉아있는 모습을 하고 있으며 목부분에는 항상 백지가 감겨져 있으며 산정상에는 당산이 있고 해마다 정원보름 날에는 소를 잡아서 당제를 지냈으며 또 다시 내려와서 탑할머니에게 제사를 지냈으며 배가 출항시에는 반드시 탑할머니에게 고사부터 지낸후 출항 하였다.
영세 어업이 주업인 거아도 주민들은 봄철에나 전마선으로 섬 주위에서 어업을 하였을 뿐 풍랑이 심한 가을 어장은 불가능 하여 밭농사로 식생활을 해결 하였으며 농업을 주업으로 한 주민도 상당 수 있었다.
오랫동안 거아도 주민의 교육 수준은 상례(喪禮)와 제례(祭禮), 그리고 당제(堂祭) 등 의식 행사에서 필요한 축과 지방을 쓰는 정도만 면면히 이어왔다.
의식 있는 사람들은 그의 자식을 육지에 보내어, 기초 한문을 교육받고 돌아와 청소년 들에게 기초 한자를 기르치기도 하였고, 육지의 한문선생을 모셔와 농한기와 겨울철에 교육을 시키기도 하였다.
1948년 섬 주인 최병원이 교지 1천여 평과 사택 건축용 목재를 희사하여 남면초등학교 분교장으로 개교하게 되어 이만순 교사가 첫 부임하였다.
6·25이후 분교장에 희망하는 교사가 없어 본교인 남면초등학교 교사들이 6개월씩 순회 근무하기도 하였으며 1960년대 들어서면서 2학급 50여명의 단급학교에서 복식 학급으로 명실공히 학교의 모습을 갖추었으며 주민소득이 낮아 중학교 진학은 거의 전무한 상태였다.
역사서에 기록된 내용을 살펴보면 고려중기 1123년 송나라 서긍의 선화봉사 고려도경에는 알자(軋子)섬으로, 조선 인조시 승정원 일기에는 거아도(居兒島)로 기록되었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는 경(鏡) 도로 표시 되었으며 특히 260년 전 여지도서(輿地圖書)에서는 면내에서 가장 큰 마을로 70여 세대에 300여 주민이 거주 하였으며 섬 주민이나 인근에서는 그 섬을 거울섬(鏡島)이라는 맑고 아름다운 섬이었다.
거아도에서 주민들이 철수한 것을 역사적으로 살펴볼 때 최소한 3번정도 철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고려말 왜구의 침략으로 태안군이 폐군되었다가 다시 복군된 사실이 확인된다. 
1380년 최무선(崔茂宣)에 의한 진포(鎭浦-금강하구) 해전에서 500여척의 왜선을 격파 시키는 등 대대적인 전쟁이 거아도 주변에서 벌어져 이때에 거아도의 주민들이 처음으로 철수되었을 가능성이 많다는 주장이다.
두 번째로는 승정원일기에 나타나는 기록으로 볼 때 본의 아니게 철수 되었을 가능성이 많다고 추측되는 기록된 내용을 보면 비변사 제찰사 이성구의 건의에 따라 안흥진 앞 바다는 남쪽의 전라도 군산도에 이르는 사이의 수로 6백여리 풍랑이 험란하여 안흥 앞바다에에서 선박들이 전복되는 위험한 곳으로 소개하면서 군사 목적 보다는 조운상 국가의 필요에 의해 주민들을 강제로 이주시킨 것으로 보여진다.
세 번째로는 1978년 국방과학 안흥(ADD)연구소 한국식 미사일 발사 시설이 설치됨으로 1978년에 삼도가 1987년 거아도 본도가 폐촌 되었다.
1985년까지만 해도 거아도에는 61가구, 281명의 주민이 살고 있었으나 1986년 사격시험장으로 지정되면서 이후로는 소개(疎開)되어 현재는 무인도 되어 있다. 
몽산포 해수욕장에서 거아도 뒷편으로 바닷길을 따라 약 17㎞를 가다보면 3개의 섬이 약 2㎞의 사이를 두고 줄을 이어 다정스럽게 떠있다. 
행정구역으로는 남면 거아도리로 지난 78년 국방용지로 편입됨에 따라 그 아름다움을 세상에 들어내 보지도 못한 채 무인도로 바뀌어 버린 비운의 섬 '삼도'다.
세개의 섬중에 가운데 위치한 가장 큰 섬을 삼도라고 하는데 세섬 모두를 통털어 삼 섬이라고 부르기도 한다.?어쨌든 정확한 명칭은 삼 섬, 지치도(知致島), 울미도(蔚美島)로 섬들의 닮은 모습이 비슷하여 부르게 되었다.
한때는 초등학교의 분교장까지 있었음은 물론 10여세대가 살고 있었서 거아도리 마을의 1개반(班)으로 구성되어 있던 제법 큰 섬 이었지만 1978년 1월 국방과학 연구소에서 인수 주민들이 모두 철수하게 되어 무인 도서로 변해 버린 섬이다.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섬, 섬을 잃은 사람들은, 오늘도 됫병 소주를 퍼 마신다. 이 시는 태안 남면에서 태어나 30여년간 교직을 거치면서 고향을 주제로 작품활동을 하는 수필가이자 시인인 최재학 “잃어버린 섬”의 시다.
옆집에 숟가락이 몇 개 있는지 그 집이 지금 밥을 하는지 죽을 쑤는지 그 속을 다 알던 시절 이웃끼리 애써 서로 숨길 것도 없고 숨겨 지지도 않았다. 낮은 담장 너머, 때로는 아예 담조차 없어 안과 밖의 경계 나와 이웃 사이의 울타리가 존재하지 않았고 그러니 터놓고 살아왔다.
내 것도 네 것도 없이 한집처럼 살아가던 순박한 섬 사람들은 식량은 물론 심지어 성냥도 석유 기름도 함께 떨어지던 철저한 생활 공동체로 경사는 내일 네일이 없이 함께 즐겼으며 아기가 아파도 주민 모두 밤잠을 설쳤다. 
우직하고 순박하던 그들은 하루 아침에 고향도 일가 친척도 버리고 거친 세상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며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살아가고 있으며 고향 방문은 고사하고 지도에서 조차 찾을 길이 없다.
애절한 사연뿐인 서해 낙도  거아도와 삼 도! 
이제는 기억에서 조차 가물거리는 있어도 없는, 잃어버린 섬이 되었다.  
지난해 태안을 방문한 관광객은 1700만명 이었으나 올해는 2000만명이상  방문하여 꽃과 바다의 도시 태안이 좀더 활기를 뛸것으로 예상 되며 여름에는 해수욕, 해루질, 낚시 및 캠핑장도 성행하고 있으니 새로운 관광지로 발돋음 하기를 기대한다.

SNS 기사보내기
태안미래
저작권자 © 태안미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