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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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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며듦의 미학
태안미래  |  tanew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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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2.10.27  10: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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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필서예가 림성만

예술은 물질은 통해 실현된다. 물질은 작가의 예술을 현실로 가져와 현실의 세계에서 관객과 만나게 하는 매개체인데, 물질을 통해 예술이 실현될 때, 우리는 비로소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다. 물질은 예술을 이해하는 좋은 출발점이다. 동양의 회화 예술은 매우 역사가 깊고 다양한데, 그중 물질의 역할이 중요한 수묵화(水墨畵)예술을 살펴보고자 한다.
과학적 관점에서 수묵화는 종이나 실크 위에 인쇄된 탄소 기반의 잉크 예술이다. 수묵화는 물과 먹을 혼합하여 그리는데, 수묵화의 ‘묵(墨)’은 우리말로 옮기면 ‘먹’인데, 먹의 성분은 흑연이다. 천연 광물인 석묵을 물에 녹여 옷칠을 섞은 것이 먹의 시초인데, 현재는 탄소 분말에 아교액을 섞어 단단한 먹을 만들어내고 있다. 따라서 먹물은 천연 잉크라 할 수 있다. 벼루에 정성 들여 곱게 갈린 검은 먹물은 붓에 담겨 종이 위로 옮겨 놓으면 하나의 작품이 되는 건데, 작가의 섬세한 필치에 의해 먹물은 종이 위에 형태를 갖추고 스며들고 마르며 작품이 되는 거다. 수묵화는 물과 먹이 만드는 먹물의 물성, 전달자로서의 붓의 물성, 종착점으로서 종이의 물성이 만드는 종합예술이다.
먹물이 종이 위에서 춤추듯 마르고 스며드는 현상은 오롯이 물리적 작용이다. 이 상황을 좀더 단순하게 고찰해보고자 한다. 물방울이 종이 위에 떨어지면 종이의 수많은 기공 안으로 스며들면서 서서히 마르게 되는데, 이때 먹물이 종이에 스며드는 양이 적고, 늦게 마르면 너무 넓게 스며든다. 얼핏 보면 마르는 작용과 스며드는 작용이 경쟁하는 것 같지만 사실 두 작용의 관계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스며드는 과정이 마르는 속도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 이 관계는 전적으로 종이와 먹물의 물성에 달려있으며, 작가는 물성에 따른 현상과 결과를 매우 정교하게 제어하는데, 수묵화는 먹물의 스며드는 정도에 따라 진하거나 연하게 표현된다. 따라서 먹물의 마르고 스며드는 물리적 작용만으로 다양한 표현이 가능하다.
동양의 종이와 먹 기술은 역사가 깊다. 종이는 105년 중국 후한 시대 사람 채륜(蔡倫)이 나무껍질, 마, 창포, 어망 등 식물 섬유를 원료로 이용해 최초로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그 후 그 이전 시대 사료들이 발견되면서 채륜이 기존의 종이 제작 기술을 개량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6세기경 당나라와 활발하게 교류했던 신라시대에 먹, 붓, 종이 기술이 전해졌고, 610년 담징이 일본에 전했다고 한다. 종이는 곰팡이나 물에 닿으면 소실될 우려가 있기에, 아주 오래된 수묵화 작품은 대체로 실크에 그려진 것들이다. 실크는 누에의 고치로부터 얻은 천연 단백질 섬유로서 종이보다 훨씬 안정적인 재료이다. 실크의 치밀하고 부드러운 섬유 조직은 종이의 조직보다 오래간다. 기공이 많은 실크에서는 먹물의 스며듦이 종이보다 빨라 섬세한 붓 작업이 필요하다.
서양미술사를 집대성한 20세기 미술사학자 에른스트 곰브리치는 동양의 수묵화에 깊은 경외심을 갖고 있었다. 그는 저서에서 수묵으로 그린 12~13세기 중국의 산수화를 두고, “실크 두루마리에 그린 그림은 아름다운 상자 속에 보관되었다가 조용한 시간에 꺼내어 마치 시집을 들고 아름다운 시를 음미하듯 펼쳐서 감상하거나 음미하는” 위대한 걸작이라 했다.

「빨라도, 늦어도 안 된다」
수묵화의 대표 작품으로 살펴볼 작품은 조선 초기 안견(安堅, 생몰년 미상)의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 1447년 작품인데, 〈몽유도원도〉는 안견 자신만이 아니라 조선 전기 예술 전체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조선 전기 작품이 매우 드문데, 이 그림은 거의 완벽한 상태로 보존됐다. 1447년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이 초여름 밤 꿈속에서 도원(桃園)의 풍경을 보고 감탄하여 안견에게 전했고, 안견은 들은 내용을 사흘 만에 그림으로 완성했다고 전해지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림 속 도원은 이상적인 정치를 꿈꾸던 안평대군의 비전을 담은 가상의 공간이다. 안견의 그림은 중국 최고의 수묵 산수화가로 알려진 북송시대 사람 곽희(郭熙)의 화풍에 영향을 받았다. 북송 시기는 채색 없이 먹물만으로 절제된 표현을 선호했던 수묵 산수화가 전성을 이룬 시대였다.
안견은 조선 세종과 문종 전후에 주로 활약했던 충남 서산시 지곡면 출신 화가로 안평대군을 가까이 섬기며 그가 소장한 오래된 그림들을 섭렵하면서 자신의 화풍을 완성했다. 그의 화풍을 북송의 곽희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지만, 나름의 특이한 양식을 확립한 것으로 보인다. 대상이 흩어진 듯 조화를 이루고 확대 지향적인 공간 개념과 변화가 큰 필법 등이 그의 그림적 특징이다.
그림을 살펴보자. 일반적인 두루마리 그림과 달리 현실의 세계가 왼쪽에서 시작하여 꿈속의 도원이 오른쪽에 그려져 있다. 그림 중간 부분은 현실과 꿈속이 이어지며 동굴을 빠져나와 계곡으로 이르는 공간을 나타낸다. 오른쪽으로 갈수록 폭포를 지나 절벽 위 복사꽃이 만발한 도원에 닿아있으며, 오른쪽 맨 위에 아담하고 평화로운 초막 같은 건물이 보이는데, 현실과 꿈속을 구별하기 위해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보는 다시점(多視點) 화법이 쓰였다. 현실 세계의 왼쪽 풍경은 앞에서 바라보지만 오른쪽 꿈속의 도원은 위에서 내려다보는 부감법(俯瞰法)이 사용되어 꿈의 몽환적 느낌을 강조했다. 
한 두루마리에 여러 시점과 다양한 대상을 그리면서도 수묵으로 아주 섬세하게 풍경을 묘사했는데, 현실과 꿈의 세계가 하나의 이야기로 조화를 이루며 마치 판타지 영화를 보고 있는 듯하다. 안평대군은 이상적 세계로서의 도원을 꿈꿨고 안견은 그의 이상을 담백하면서도 웅대한 수묵화로 표현했다. 채색 없이 수묵의 묵직한 느낌으로 장엄한 분위기를 연출한 것인데, 안타깝게도 안견의 〈몽유도원도〉는 한국 미술을 대표하는 걸작이지만 임진왜란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현재 덴리대학에 소장되어 있다. 수년 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한달간 전시가 있었는데, 덴리대학에서 빌려와 볼 수 있었지만, 통탄할 일이 아니던가.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우리 그림을 우리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찾아오지 못하는 현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인지.

「중요한 과학 연구 주제, 스며듦」
수묵화의 가장 중요한 형식 요소는 두말할 필요없이 선이다. 붓으로 다양한 굵기와 명암의 획을 표현할 수 있으며 이것으로 수많은 다양한 표현을 창조한다. 먹물의 스며듦은 붓으로 표현할 수 있는 선의 효과가 매우 잘 나타나 있다. 먹의 스며듦을 섬세하게 제어하여 바위와 복사꽃 등 사물의 윤곽이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실크에는 먹물이 빠르게 스며들기 때문에 붓을 가볍고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 또한 먹물의 스며드는 정도에 단계적 차이를 두어 가파른 절벽의 명암을 적절히 조절하여 입체감과 원근감을 나타냈다. 
당시 동양의 화가들은 자연을 직접 관찰하며 사생하기 보다는 대가의 작품을 먼저 보고 탐구하여 나름의 명상과 정신 집중을 통해 그림을 그리는 방법을 택했다. 그렇게 기법을 완전히 터득한 후에야 자연을 바라보며 그 아름다움을 깊이 마음에 새겨 집으로 돌아와 마치 시인이 산책하다가 머리에 떠오른 여러 이미지를 짜맞추어 시를 쓰듯 떠오른 이미지를 결합해 그림을 완성했다. 실크 두루마리 위에 그림과 시가 자주 어우러진 이유가 여기에 있는데, 작가는 예술적 영감이 생생하게 살아있을 때 머리에 떠오른 이미지를 붓과 먹으로 단숨에 그려냈다. 
한 편의 아름다운 수묵화가 완성되려면 작가의 신속하고 능란한 필치가 있어야 한다. 이것은 수묵화 기법이 작품 완성에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기에 가능하다. 먹물이 실크에 마르고 스며드는 시간은 비교적 짧은데, 순간에 떠오르는 모든 이미지를 한꺼번에 신속히 그려넣어야 한다. 일단 다 그린 그림에 덧칠하면 획의 느낌이 확 달라지기에 페인트를 칠할 때 한꺼번에 칠하는 것이 좋은 이유와 같다. 안견이 〈몽유도원도〉같은 대작을 사흘 만에 그린 것도 빠르게 스며드는 잉크의 과학적 원리가 작용했기 때문이다. 
종이와 실크에 먹물이 마르고 스며드는 물리적 현상은 현대 과학에서 다공성 소재를 개발하는 분야에서 중요한 연구 주제로 다루어지고 있는데 다공성 소재는 기공이 많아 유체 이동이 수월하고 재질에 따라 가볍고 단단하여 필터, 센서, 전기화학, 생체소재, 전자소재 등 첨단 소재로 각광 받고 있다. 나노잉크를 탑재한 잉크젯 프린터로 다공성 소재에 기능성 물질을 인쇄하는 연구가 진행 중이다. 그런데 소량의 잉크 방울을 다공성 소재에 인쇄할 때 잉크가 마르고 스며드는 현상이 매우 빠르게 일어나 정밀하게 조절하는 것이 어렵다. 
오랜 세월 섬세하고 아름다운 먹물의 스며듦을 간직한 수묵화의 과학이 다공성 소재에 세밀하고 안정적으로 인쇄하는 기술을 찾고자 하는 현대인들에게 실마리를 줄 수 있다. 안견은 먹물이 실크에 스며드는 물리적 현상을 섬세하게 조절하여 수묵으로 꿈과 이상의 세계를 실크에 담아냈으며 수백 년이 넘도록 그 섬세함이 살아있는 위대한 걸작을 남겼다. 현대 과학이 수묵화의 오랜 지혜를 배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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