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필서예가 림성만
문필서예가 림성만

시골에서 살다 보니 저녁엔 가끔 하늘의 잔별도 보게 됩니다. 요즈음 돌아가는 시국이 하도 수상하여 사람들 말로는 별 볼일 없는 세상이라지만 그래도 한여름 밤의 별들은 초롱하고, 그 별들을 보고 있노라면 어릴 적 생각이 납니다.

마당 한가운데 아버지가 엮은 밀짚방석을 깔고 한 켠에 피워 둔 다북쑥 연기로 날아드는 모기를 쫓고 있노라면 밭일을 힘들게 마치고 지친 몸으로 돌아온 어머니가 밀국(칼국수)을 만들어 애호박 채 썰고 들기름 넣어 볶은 나물을 곁들여 잘 익은 열무김치와 함께 어린 동생들과 나눠 먹던 그 맛을 어찌 잊겠습니까. 그땐 별다른 조미료가 필요 없었고 그야말로 어머니의 손맛 하나였지요. 하지만 그것조차 먼 옛이야기로만 남아 있습니다.

강원도 정선 지방에서 그 옛날 나뭇꾼들이 즐겨 부르던 아라리 중에서 ‘비가 오려나 눈이 오려나 억수장마 지려나’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렇게 억수 같이 퍼붓던 비도 이제는 그쳤습니다만 뉴스를 보니 남쪽지방은 비 피해가 말이 아니더군요. 이곳은 다행히 피해가 없지만 같은 민족으로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 피해현장을 보면서 문득 ‘생명의 본성은 부드러움’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부드러움, 이것은 가까운 뒷동산에만 올라가 보아도 잘 알 수 있습니다. 바람이 불면 말라죽은 삭정이는 쉽게 꺾이지만, 살아있는 나뭇가지는 휘청거릴 뿐 쉽사리 부러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러한 생명의 본성을 깨닫지 못하고 부드러움보다는 굳셈을 근본으로 삼으려 하고, 약함보다는 강함을 숭상합니다.

노자는 부드러움의 상징으로 ‘물’을 예찬하고 있습니다.

 

물보다 약한 것은 없다. 그러나 강한 것을 이기는 데는 그것을 당할 것이 없으며, 어떤 것도 물을 대신할 만한 것이 없다.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고 부드러운 것이 단단한 것을 이기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이것을 행하지 않는다.

 

세상에서 강한 존재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바위 같은 존재가 되기를 바랄 것이지만, 노자는 바위가 아닌 물을 찬양합니다. 물은 부드러운 성질을 지니고 있기에, 물은 그 자신의 형태가 없이 항상 흐릅니다. 물은 전체가 주는 형태면 무엇이든 취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물의 마음을 지니면, 어디서나 화평을 꽃피우는 매개가 될 수 있습니다.

또한 물은 항상 낮은 곳으로 흐릅니다. 물은 위로 올라가는 법이 없는데, 항상 아래로, 아래로만 흐릅니다. 무엇이든 위로 가려할 때는 경쟁과 질투와 다툼이 생겨나며, 불이 항상 위로 올라가려는 성질을 갖고 있다면, ‘물은 항상 아래로’ 낮은 곳을 지향합니다. 우리가 물과 같은 부드러운 마음을 지니면, 쉽지는 않겠지만 다툼이 없는 아름다운 세상의 주체가 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이처럼 약하고 부드러운 것이 단단하고 강한 죽음의 세력을 이기는 힘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힘은 아주 미묘하기 짝이 없으므로, 왜 미묘하다고 하는가 하면, 누가 물이 강한 힘을 가졌다고 생각이나 하겠습니까. 그러나 깊은 산에 가보면, 산 위에서 줄기차게 ‘한 방울씩 떨어지는 물이 바위를 깎아내고’ 더러는 큰 구멍을 뚫어 놓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는 생명의 신비요. 존재의 수수께끼입니다. 이번 남쪽지방의 수해현장을 보더라도 물이 얼마만큼 무서운가를 느끼게 되었습니다만 물 이야기가 너무 길어졌습니다.

산과 들, 그리고 바다가 어우러진 곳. 해마다 4월과 5월이면 주꾸미가 많이 잡히고 요즘엔 오징어가 동해안보다 더 많이 잡히는 청정바다, 불과 제 연구실에서 승용차로 15분이면 닿는 곳. 노을을 보고 싶어 충남 태안 몽대포구(夢垈浦口)를 찾았습니다. 마침 서쪽 하늘을 붉게 물들이던 낙조는 그것이 과연 실재한 것이기는 했던지, 생겼다가 사라짐이 순간이었습니다. 맑고 버언 하던 하늘에 마지막 남은 빛조차 까무룩 하게 사라진 뒤, 오른편 산등성이 위로 송편보다 큰 달이 떠올라 제 세상을 이룹니다. 몽대포구에 무리 지어 들어온 고깃배는 지금 무슨 속사정일까요. 하루는 그렇게 보일 듯 말 듯, 사위는 빛을 뒤로 한 채 이젠 어둠이 내려앉습니다.

지친 하루를 보내고 소주잔을 기울이는 사람들의 틈 사이로 자리 잡고 오징어가 풍년이라서 숯불 석쇠 판에 살아 움직이는 오징어를 반으로 잘라 올려놓으니 세상이 비틀린 것을 알기나 하는지 그것조차 함께 춤을 춥니다. 쪼개진 농가의 아픔인 양파, 고추와 함께 오징어를 안주 삼아 쓰디쓴 희석식 소주를 목구멍으로 넘기니 비어있는 허한 가슴팍은 어스름 빛과 함께 이내 열기로 가득 차오르고 이번엔 파도를 안주 삼아 또 한 잔을 마셔 봅니다.

들립니다. 작은 파도 소리가-

그 파도 소리는 지금 곱습니다. 파도 소리를 무척이나 좋아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바다에 몸을 얹으려 군대조차 바다와 관계되는 곳으로 갔습니다만 지금 보이는 저 바다는 어쩌면 처연한 바다인지도 모릅니다. 건너서 말하겠습니다. 한때 시중 서점에 ‘재미있는 인문학’ ‘쉽게 읽는 인문학’ 등 여러 종류가 있었지만, 어디 그게 솔직히 재미있고 쉽던가요. 그래도 소주 탓으로 돌리지는 않으렵니다. 다만 모든 것이 재미있고, 쉽게 나가려는 세상풍토가 싫다는 겁니다. 지금 그걸 이야기하려는 건데, 사람들은 바닷가에 가면, 그물만 있으면 고기는 당연히 잡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렇게 바다에서 쉽게 고기를 잡을 수 있다면 어부는 필요 없겠지요. 만약 그렇게 된다면 세상은 어찌 되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땀 흘려 노력하지 않고 건들거리고 사는 사람들이 오히려 득세하는 세상인데, 그러나 그건 결코 오래가질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저에게 말합니다. ‘강해 보이기도, 또 한편은 낭만적인 것도 보인다’라고 하니 어느 장단에 춤춰야 할지 난감합니다. 물론 그것조차 제 몫이란 것 잘 압니다. 그렇다 해도 지금의 상황 이건 아닌데, 지금 세상풍토는 도무지 앞과 뒤가 없는 것 같아 마음이 답답해 두서없이 이 글 적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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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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