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필서예가 림성만

 

마음 깊이 자리한 우물에 물음표를 단 조약돌 하나를 던졌다

 

세상이 수평과 수직의 싸움이듯 아름다움도 한 순간 덧없이 사라져갑니다. 기다림은 꿈속에서도 뒤척거리는걸까. 촛불이 꺼지기 전엔 일렁이거늘 가장 빛나는 별은 아직 뜨지 않은 별인데, 그리워 할 대상이 없어도 그리움은 사무치는것.

모든 것은 남는 것이 아니라 사라져 가는데, 어제보다 나비들의 날아오르는 날갯짓도 결국 낮은 자리로 돌아가건만 어찌하여 오리 다리는 짧고 학의 다리는 길다고 했던가.

법당의 부처가 조용히 지켜보다가 물었다. ‘내 손가락 하나가 길면 넌 자르겠느냐’ 찰나의 순간에 떨어지는 동백꽃처럼 사는 것은 우리에게 상처 입은 영혼의 구슬인데, 흥주사의 언어는 철저한 침묵의 소리다. 목탁소리 종소리 북소리 독경소리 아래로만 흐르는 낮은 자세의 물소리, 꽃은 피었다가 피안의 세계로 돌아 가겠지만 떨어지는 흥주사 은행나무 이파리 처연합니다.

산사의 소리는 다만, 적막의 넓이와 깊이를 나타내주는 고요의 척도일 뿐인데, 아침에 창밖의 백화산이 눈에 들어옵니다. 맑은 가을 하늘 아래 황금빛 담채가 누리에 깔리는데, 숲은 보되 나무를 못보고, 나무를 보되 숲은 보지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지만 나무가 모여 숲이 되니 나무를 먼저 보는 것이 사리에 맞는 것이겠지요.

숲에는 큰 나무 작은 나무 모두 어우러져 살아갑니다. 그런데 바람이 불면 가는 몸통의 나무는 뿌리도 흔들리는데, 굵은 몸통의 나무는 잎새만 흔들립니다. 큰 나무는 햇빛이나 비를 가려주기도 하고 한여름엔 땀을 식혀주는 시원한 바람도 모아주는데, 큰 나무하면 그늘 아래 평상을 놓고 쥘부채 흔드는 촌로의 모습이나 멀리 떠나간 낭군을 기다리는 여인의 처연한 눈길도 그려집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 간다는 것, 돌이켜보면 외면은 몰라도 내면의 진솔함, 자신만의 생각은 있겠지요.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하나. 그 것이 숙제입니다. 저는 잘 살지 못하지만 진솔함, 바꿔말하면 솔직함 하나는 있는거죠. 아니 직선적인 것이 앞에 있네요. 어느새 11월의 끝자락, 감히 화살같은 세월입니다.

얼마남지 않은 한 해. 서서히 지난 일을 반추해보면, 내게 과연 쉼표는 있었던가. 콕집어 말하면 지나가는 가을, 넉넉했던 여행은 쉽게 잊을 수 없습니다. 쉽지 않은 시간의 결정과 어려움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추억의 한페이지였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느낀 건 무엇인가! 평소에도 저는 자연주의자였지만, 이번 여행으로 더욱 더 자연을 사랑하게 되었고, 그 자연에 동화된 것은 감히 농사로 표현하면 별다른 수업료 없이 깨달은 수확이었지요. 살면서 느끼고 산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증거인데, 무엇을 더 바랄 수 있을까요. 그럼에도 언행에 조심하지 못하고 살아오지는 않았는지, 곰곰이 반성해 보는 중입니다.

쉴 수 있고, 느낄 수 있으며, 불필요한 말을 내뱉지 않으면서 살아가는 것이 어떻게 생각하면 쉬울 것 같지만 간단치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하고 싶은대로만 행동하면서 살아간다면 질서는 그냥 무너지는 것이지요. 요즘 결혼 청첩장이 쌓이는데, 자식을 키워내고 출가 시켜본 경험자로서 과연 젊은이들이 이 험난한 세상을 어떻게 견뎌낼지 한편으론 걱정되는 것이 현실이기에 우리 기성인들의 책임이 정말 막중합니다.

보고 배우고 그 것이 꼭 학교에서만 있는 건 아니지요. 무엇보다 가정과 인생 선배로서 옳은 것을 보여줘야 하는데, 자신은 역행하면서 올바른 길로 가라고 말한다면 이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말할 때, 망설여 지는건 그건 답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름 정의하면 ‘진솔함’ 인데, 그 것 말고 다른 말이 필요한건지 고민해봐야 하겠지만, 우린 정직하지 못한 채 살아왔음을 고백해야 합니다. 물론 그 것 조차 저 혼자만의 생각인지 모르지만 조금은 솔직해져야 하지 않을까요.

살면서 쉬고 싶은 생각이 드는 건 지쳤다는 것입니다. 돌아가고 싶다면 너무 멀리 와 있다는 것인데, 너무 멀어서 지쳐 있었고, 그 때 너무 먼곳에서 서성였습니다. 그 때 들리는 솔바람 소리, 솔잎 스쳐 가는 소리의 향기, 이럴 때 솔숲에 마음 편하게 자신을 내려놓고, 송순차 한 잔 마시는 겁니다. 시절도 한 때, 사랑도 한 때, 시간의 목졸림에서 사람 사이의 욕망 속에서 그대를 구해야 할 때, 그대 마음을 풀어야 할 때, 그 때 쉬고 싶다면 고즈넉함 속 절집마당 넉넉한 흥주사로 와보시는 건 어떨지요.

휴식이란 사이입니다. 일과 일 사이, 속도와 속도 사이, 욕망과 욕망 사이, 생각과 생각 사이의 텅 빈 공간이며, 텅 빈 시간입니다. 흥주사 대웅전 앞 「만세루」 정자 마루에 아침 햇살이 스며듭니다. 해가 떠서 뭇 생명에게 화사한 빛을 선사하고 만물에게 생명의 뜨거운 기운을 불어 넣어준 뒤에 지쳐서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저녁 햇살은 그래서 노곤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가는 가장을 닮았던 겁니다.

흥주사 만세루는 정치와 명리의 세계에서 떠나 자연으로 돌아온 사람들이 모든 것을 잊고 모여앉아 시와 정담을 나누던 공간입니다. 수많은 선승과 선비들의 무릎과 발과 엉덩이가 와 닿아 번쩍번쩍 윤이 났었고, 그 것도 고려시대부터 세월을 이어 이 마루를 반질반질하게 만들었지만, 이젠 뽀얀 먼지속에 세월의 주름이 마루바닥에 한 점 한 점 그 때의 기억을 간직한 채 적혀있을 뿐입니다.

그 우물마루에 저녁 햇살이 솔밭 사이로 살짝 들어와 한낮의 햇빛보다 강렬하지 않아서 마음이 포근해집니다. 그 것은 보드랍게 만물의 휴식을 재촉하는 햇빛이며, 산등성이 너머로 하늘빛은 노을입니다. 곧 밤이 오고 깊은 잠에 빠져 휴식하고 가족들이 모여 저녁밥을 먹으면서 안식하라는 명령처럼 느껴지는데, 우리 삶을 부추켜주는 보드라운 자연, 그 자연의 모습이 인간의 세월 속에 내리는 빛살, 나는 그 것이 예술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술, 남들은 그 것이 무엇이냐고 말할지 모르지만 조금은 아프기에 말하는건데 그거 아시나요.

늦가을, 흥주사 뜨락에서 생각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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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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