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와 대나무(4)

전남대학교에서 공부하고 출가했던 법정스님이 말씀하신‘불일암’의 빠삐용 의자를 본 적이 있다. 그 의자는 텅 비어 있는데, 의자는 암자로 올라온 손님이 있을 때는 손님용으로, 사람이 없으면 스님이 앉을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손님이 없고 스님도 없을 때는… 그냥 비어 있는 건데, 그 비어 있음이 바로‘텅빈충만’이다. 그런 스님이 대나무 평상 위에 누워 다비식장으로 향했고, ‘강원도 오두막의 대나무 평상 위에 내 몸을 놓고 다비해라. 사리도 찾지 마라. 남은 재는 오두막 뜰의 꽃밭에 뿌려라.’그랬다. 재마저도 뿌려서 흙으로 돌아간 뒤의 정적이 바로‘텅빈충만’이었다. 대나무가 비어서 충만하고 곧게 자라듯이….

대나무 숲과 가장 어울리는 짝이 있다면 바로 바람일 것이다. 바람은 형체가 없지만 나무가 살랑거리는 것으로 바람이 부는 것을 알고 있으며, 대숲에서의 바람은 자신의 존재를 이렇게 드러낼 뿐만 아니라 소리까지 낸다. 그래서 옛날 시인은“바람은 대나무 숲에서 거문고를 연주한다.”고 했나 보다. 정말 대숲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여느 바람과 다르게 울리는 공명음을 내는 것 같고,‘쏴’하는 파도소리 같기도 하고,‘윙’하고 무엇이 울리는 소리 같기도 하다.

「소쇄원」의 경치를 노래한 옛 시인의 <대숲의 바람소리>를 보면

무정한 바람과 대나무는

날 저물자 석양에 피리를 연주하네

 

라고 했다. 대숲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정말 피리 소리처럼 청아한 공명음인데, 대나무 숲에 가거든 반드시 귀를 기울이고 숲에서 불어오는 바람소리를 들어볼 일이다. 이렇게 대숲과 바람은 대화를 하는데, 아니 대숲에 바람이 스치우면서 우리 사람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이리라. 귀를 기울여 들어보라.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 않는가. 세상의 더러움을 씻어버리고 자연과 함께 어울리라고 부르는 것 같기도 하다.

대숲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면 우리는 자연과 하나가 되고, 자연의 한 부분으로 귀환하는 것이다. 그렇다. 원래 있었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이라. 거기서 더 무엇이 필요한 것인가. 우리는 바람이 되는 것을. 그래서 바로 담양「소쇄원」의 사랑방이“빛과 바람이 머무는”「광풍각(光風閣)」이 아니던가.

사람이 머무는 곳이 아니라“빛과 바람이 머무는 곳”. 사람은 그런 자연의 일부가 되고, 아무 형체도 없는 빛과 바람 속에 사람이 오히려 주인이 아닌 손님이 된다. 이 얼마나 기막힌 발상인가 하여 이곳에 오면 모두가 바람이 되고 자연의 일부분이 되어 마음의 때를 씻어버리게 된다.「소쇄원」이란 이름처럼‘맑고 깨끗한’자연의 한 부분으로 돌아오는 것인데, 나도 대숲을 스치는 맑고 자유로운 바람이 되고 싶다.

대나무의 예지와 덕은 바람 불어올 때 휘어지는 그 아름다운 겸손에 있으며, 휠지언정 꺾이지 않는 지조와 덕으로 고아한 군자의 모습에서 절개와 기개를 느끼는 것은 대나무가 곧고 강직하기 때문이다. 정몽주의 선죽교나 민영환이 자결한 곳에 혈죽(血竹)이 돋아났다는 이야기는 옮겨 심으면 곧바로 죽어버리는 대나무의 성질을 의인화 한 것이다.

뿌리로 번창하는 그 시세는 우리에게 단결과 화합의 힘이란 얼마나 큰 것인가를 보여주는데, 뿌리가 엉켜 땅을 붙든 그 단결의 힘에는 지진이나 해일도 당해낼 수 없다. 혼인의 차례상에 소나무와 대나무를 꽂는 이유도 금실과 사랑의 상징이 또 대나무이기 때문이며, 사랑과 화합의 나무가 대나무이다.

 

[선비와 대나무]

교육의 일념으로 20년 동안 운영하던 서예학원을 그만둘 때까지 학원 바깥 문 옆에는 오죽(烏竹)을 심어놓고 선비(?) 생활도 해봤지만, 몇 해 전 오죽을 분(盆)에 넣어 두 개를 만들어 봤다. 시골집 돌담, 바람이 지나가는 그런 환경은 아니지만, 수년째 푸른 잎 살랑대는 오죽이었는데, 한 개는 서울에서 거주하면서 숭실대학교에 근무하는 교수에게 나눠주고 지금은 외로이 아니, 꿋꿋하게 잘 커나가고 있다. 언젠가 너른 마당이 있는 집을 마련하게 된다면 대나무부터 심겠다는 마음인데, 내심 나도 선현(先賢)들처럼 대나무를 곁에 두고 글 쓰고 그림 그리면서 무늬만이라도‘선비’가 되어 보겠다고 다짐해 보는데, 그때가 언제일지.

하지만 그때가 되어 내 공간을 방문하는 이들에게 대나무 이야기를 늘어놓아야겠다.“선비는 말이야, 집에 고기는 없어도 대나무는 꼭 길러야 돼. 대나무 덕성을 본받아서 인간의 본성에 깔려 있는 속기를 씻어내야 하거든. 고기를 못 먹어서 발병하면 병원을 찾으면 되지만 사람이 한번 속(俗)되어지면 치유가 어렵단 말이야.”하면서 호기 있는 소동파의‘녹균헌’과 백낙천의‘양죽기’를 들려주어야겠다.

 

대나무는 견고하니 그 견고함으로써 덕을 심는다

대나무는 성품이 곧으니 그 곧음으로써 몸을 세운다

대나무는 마음이 비어있으니 그 정절로써 뜻을 세운다

이 때문에 군자는 대나무를 심는다

대나무는 그 마음이 비어있으니 내 벗으로 삼고

몸은 성품을 맑게 할 수 있으니 내 스승으로 삼는다

 

옛사람들이 좋아했던 대나무에 대한 ‘양죽기’라는 글인데, 지조 높은 선비의 절개처럼 고고함을 지닌 대나무에 대해 이렇게 노래했다. 사철 지칠 줄 모르는 푸름을 간직한 채 이 찬바람 속에 눈부시게 푸름을 빛내는 절경에 빠지니 가슴이 확 트이고, 하루하루 도시생활에 지친 심신이 맑아지고 정화되어진다. 대숲을 거닐면 겨울바람이 머리를 스치고 코끝을 간지럽히는데, 대숲에 이는 소리는 청아하다 못해 시리기까지 하다. 하늘을 찌르듯 빼곡히 늘어서 있는 대나무 숲이 뿜어내는 향연은 술에 취하듯 온몸이 감흥에 젖는다. 마치 또 다른 세상에 와 있는 듯….

왜 실패가 없었겠는가. 처음엔 아무것도 모르고 대나무를 분(盆)에 옮겨 키웠는데, 한 해 잘 보내던 대나무가 시들시들 죽어갔다. 알고 보니 겨울철이라 창문을 닫고 지냈더니 통풍이 안 되어서 그렇다고, 부랴부랴 창문을 열고 때 아닌 선풍기로 바람을 만들어줬지만, 어쩌랴. 온갖 정성에도 때가 늦었음을… 갑자기 어디선가 크게 꾸짖음이 들려왔다.“이놈아 선비는 아무나 되는 줄 아느냐! 하던 서예와 그림이나 열심히 해라.”한다. 그래 맞다. ‘남명 조식’선생의 내가 선비면 대한민국 어느 누군들 선비가 아니겠는가.

내 당호가 락기실(樂飢室)이다.‘굶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즐겁게 생각하는 방’인데, 어찌 굶는 것을 즐겁게 생각하겠는가.‘마음의 절제로 삼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죽기실(竹飢室)이다.’‘굶고 지내도 대나무를 바라볼 수 있는 방’이다. 어릴 적 여름날에 대밭에 들어가 가늘고 긴 대를 골라 낚싯대를 만들어 태안 남산리‘장명소’바닷가에서 망둥어를 잡던 일이 눈에 선하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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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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