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영식(58ㆍ태안읍 남문리ㆍ크리스탈브띠끄) 동학농민혁명내포유족회장이 백화산 '교장바위'에 얽힌 사연을 설명하고 있다.
문영식(58ㆍ태안읍 남문리ㆍ크리스탈브띠끄) 동학농민혁명내포유족회장이 백화산 '교장바위'에 얽힌 사연을 설명하고 있다.

“아버지, 아버지에 아버지, 또 아버지에 아버지에 아버지. 모두가 한평생을 한 속에 사셨습니다. 할아버지는 증조부대신 사형당하셨고, 3ㆍ1운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귀가 잘려나가는 아픔도 감내하셔야 했어요. 아버지는 이러한 선조들의 혈통을 이어받아 이들의 명예회복에 평생을 거셨던 분이셨죠.”

태안군 원북면 방갈리에 동학농민운동이 뿌리를 내렸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국민 백이면 백이 전라도지방을 동학운동의 최대접전지로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다소 생소하지만 태안과 서산, 홍성, 예산 등지에서 활약했던 농학농민운동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고 보존하려는 유족회와 기념회가 이곳 태안에 있다.

지난달 29일 동학농민운동의 후예라 자부하는 문영식(58ㆍ태안읍 남문리ㆍ크리스탈브띠끄ㆍ사진) 동학농민혁명내포유족회장을 만날 수 있었다.

그녀는 태안군 전역에 걸쳐 생존하고 있는 동학농민운동 가담자 및 유족회원들에게 심심한 위로의 말과 함께 지자체와 군민들의 무관심에 대한 안타까움을 쏟아냈다.

동학농민운동을 혁명이라 명명한 이들 유족회는 태안군내만 50여명의 회원들이 거주하고 있다.

태안화력발전소가 있는 인근 지역민들이 다수다. 이들 대부분은 노쇠한 70~80대 노인들인데 이렇다보니 동학운동의 성지 태안을 전국에 알리기에는 참으로 역부족했다고.

지난 2004년 동학운동에 대한 국회특별법이 통과되고 이를 지키고 계승하려는 유족회의 움직임도 보다 한층 탄력을 받게 됐다. 이에 1965년 국내에서는 가장 먼저 만들어진 동학농민운동내포유족회에 400여명의 회원들이 가입을 마쳤다.

이러한 조그만 움직임 속에 매년 10월 29일 백화산 기슭 태안지역동학전래비와 추모비 앞에서는 추모제가 이뤄지는데, 전국 각지에서 동학운동의 정신과 뿌리를 찾아온 추모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문 회장은 “동학운동은 신분과 청일의 외세에 꿋꿋이 맞선 우리지역의 건강한 정신이자, 낫과 호미로 나라를 지킨 독립운동의 전신이었다”면서 “기념사업회의 선양사업이야말로 이제라도 동학운동의 희생자들과 그 가족들에 대한 한과 명예를 회복시키는 일”이라고 말했다.

11남매 중 9째로 아버지 고 문원덕씨의 사랑을 독차지한 딸 문 회장은 평생을 동학운동에만 매달려 집안살림에는 등한시했던 아버지 문씨를 이렇게 기억한다.

“아버지는 평생 직업이 없으셨어요. 동학운동에 미치셨죠. 자식들이 굶주림에 고달퍼도 본인은 음으로 양으로 동학운동에 가담했던 자들과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자료들을 전부 모으시는데 열중하셨으니까요. 그 당시 차도 없이 가가호호를 방문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었어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아버지가 이해가 되요. 저도 동학운동에 가담했던 조상들의 후예로 그들의 기록물과 정신을 계승해야 할 도리가 있는 선택받은 자니까요.”

침착하지만 다분히 격양된 어조로 말을 잇던 문 회장은 최기중 회장과 김기두 사무국장이 꾸려가고 있는 동학운동기념사업회와 함께 (가칭)동학혁명기념관을 짓겠다는 야심찬 목표도 있다.

걸어온 길에 비해 가야할 길이 더 많은 동학운동 선양사업.  역사로만 따져보자면, 동학농민운동은 실패했다. 하지만 이 운동을 시발로 안으로는 갑오개혁, 밖으로는 청ㆍ일전쟁, 이후 3ㆍ1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동학농민운동은 1894년 3월의 고부(백산) 봉기(제1차)와 9월의 전주ㆍ광주 궐기(제2차)로 나누는데 이른바 북접의 중심이 된 곳이 바로 우리지역 태안이었다고 전해진다.

“앞으로는 뭘 하실 계획이신가요?”

“경이정 앞에 유족회와 기념회가 함께 쓰는 사무실이 있는데, 제가 가지고 있는 유물 중 일부가 이곳에 보관돼있어요. 우리 포부대로 기념관이 설립된다면야 그곳에 기증하겠지만 현재는 이곳저곳에 분산된 유적과 유물을 지키고 알리는 게 급선뭅니다. 생존하고 있는 유족회원들도 하나 둘 나이를 먹어가고, 지자체와 정부는 이곳 유족회에 철저히 배타적이고. 걱정입니다. 그래도 끝까지 지켜낼 겁니다. 군민여러분들이 힘을 좀 주세요.(웃음)”

이날 오전 인터뷰를 마치고 백화산 추모비에서 내려오는 길에 본 그녀의 양산은 지금 그녀의 마음처럼 뜨겁게 달아올라있었다. 조국과 민족의 혼으로 그렇게 뜨겁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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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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