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 영구씨의 사진이 있는 공주간호고등학교 졸업앨범과 중년의 영구씨 부부 사진.
동생 영구씨의 사진이 있는 공주간호고등학교 졸업앨범과 중년의 영구씨 부부 사진.

김영자(68ㆍ근흥면 마금3리ㆍ사진)씨가 흑백사진이 빼곡히 정리된 앨범을 들춰보며 잠시 잠깐 잔상에 젖었다.
김영자(68ㆍ근흥면 마금3리ㆍ사진)씨가 흑백사진이 빼곡히 정리된 앨범을 들춰보며 잠시 잠깐 잔상에 젖었다.
‘어쩌다 생각이 나겠지 냉정한 사람이지만 그렇게 사랑했던 기억을 잊을 수는 없을 거야’

-패티김의 ‘이별’ 노래 중.

“영구(여동생)가 좋아했던 이 노래만 들어도 눈물이 나서 텔레비전 채널을 돌린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에요”

죽은 줄만 알았던 이부여동생이 살아 있다는 말에 언니 김영자(68ㆍ근흥면 마금3리ㆍ사진)씨는 그저 흐르는 눈물을 감출 길이 없어 보인다.

멀고 먼 나라 독일로 돈을 벌겠다며 떠난 동생. 세월의 풍파와 세간의 뒤안길, 그래도 모진 핏줄은 자매의 연을 다시금 잇게 했다.

결혼과 이민으로 생이별하게 된 영자씨와 영구씨의 사연 속으로 시간여행을 떠나보자. 영자씨의 ‘이별’ 사연은 자그만 치 4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울 성북구 김병준씨의 둘째딸로 태어난 영자씨는 친부가 작은어머니를 들여 살게 되면서 어머니, 친언니와 함께 충남행을 택하게 된다.

태안읍내서 정착해 살면서 어머니는 경의정 아래 기약국을 운영하던 전라도 정읍출신 기성주씨와 재혼하는데. 그 사이 딸(기영구)과 아들이 태어난다.

아들은 열 살 되던 해 친구들과 장명수저수지로 물놀이를 갔다 익사했고 기영구(58ㆍ그리스 테살로니키주)씨만이 영자씨 자매와 살게 됐다는데.

당시 영자씨는 지금의 K마트자리 중앙병원에 근무하며 동생 영구씨의 뒷바라지를 했고 영구씨가 공주간호고등학교를 졸업할 즈음 지금의 남편 이원진씨와 결혼하게 됐다.

공주간고를 졸업한 영구씨는 서산의료원에 취직해 일하다가 당시 월급이 4만원이라는 다소 파격적인 제안의 홍외과로 옮겨 간호사 생활을 했었다고 한다.

그때 둘째 딸을 임신했던 영자씨는 임신스트레스 등으로 지독한 우울증에 시달렸다고 하는데.

때마침 찾아온 영구씨가 이런 영자씨의 병간호를 도맡았다고. 

“우울증이 심해 하루는 농약을 먹고 토해 이틀간 의식이 없던 적도 있었어요. 그때 우리 신랑이 양조장 차를 운전했는데 연포로 배달을 갔다는 거예요. 저를 돌봐줄 사람이라곤 영구뿐이었으니까… 영구가 독일로 가기 전에는 제 병간호를 도맡았죠.”

영구씨는 이후 동창들 20~30명과 함께 서울개발공사 3개월 연수과정에서 독일어를 배운 뒤 독일로 떠났다. 당시 우리나라 남자들은 광부로 여자들은 간호사로 독일에 파견 나가는 경우가 많았다는데.

영자씨 기억에 영구씨도 3년 계약으로 독일행을 택했다고 했다.

“영구가 떠날 때만 해도 독일 물가가 비싸 옷가지며 생활용품을 전부 준비해 가야 했는데, 그땐 저도 결혼한 지 얼마 안 돼 집에 손을 벌릴 수 없던 상황이라. 딸 돌반지를 팔아 미숫가루 1말을 해준 게 전부였어요”

가난했고 배고팠던 그 시절.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멀리 떠나는 동생 옷 한 벌 해줄 수 없던 시절을 원망할 수밖에. 독일로 건너간 영구씨는 조카들에게 먹일 초콜릿이며 옷가지 등을 부쳤다고 했다.

또 때때로 어머니에게 드릴 돈과 편지를 보내 독일생활을 전했다는데 어느 때인가부터 소식이 끊기더니 점차 소식이 뜸해졌다.

“영구 나이 스물셋에 독일에 갔는데, 그때 제가 논을 살일 이 있어 200만원을 부치라고 했던 게 기억나요. 그게 부담스러워 연락이 없던 건 아닌 가 생각이 들죠”

그 후로 수십년이 흘러도 연락 없는 영구. 한간에 떠다니는 얘기로 독일에 요양 온 그리스 남자를 만나 약혼했다는 소릴 들었지만 그 흔한 전화 한통, 편지한번 없는 동생은 그렇게 추억 속에서만 살고 있었다.

“이렇게 오래 시간이 흘렀는데…죽은 줄만 알았죠. 그래서 사진이고 뭐고 다 태워버렸어요” 그런데 2년 전 영구씨와 함께 독일에서 요양원 간호사 생활을 했다는 친구 한명이 영구씨 소식을 들려 줬다.

남편 고향인 그리스로 넘어가 산다는 소식과 함께. “영구 친구는 독일남자 만나 전라도 독일마을에 와 산다는데, 우리 영구는 그리스로 가 계속 간호사 일을 한다는 얘길 들으니 마음이 너무 아프더라고요. 더구나 남편이 대장암에 걸려 옆에서 변을 받아내야 하는 신세니 움직이기도 어렵고, 작년엔 그리스발 금융위기까지 닥치면서 죽기 전에 한번 보자는 약속은 실천하기 어렵게 됐죠. 저라도 그리스에 가고 싶지만 딸 넷은 다 늦게 시집가 손녀들이 다 어린데다가 서울에 사시는 큰 언니도 15년째 누워서 간병을 받는 처지라…”

언니 영자씨는 영구씨 얼굴을 보기 위해 1년 넘게 방법을 강구해 봤지만 하늘아래 현실의 벽은 너무 높기만 했다.

영자씨가 가지니 통역이며 가이드 할 사람이 마땅찮고, 영구씨가 오자니 돈이 문제 였다. 영자씨가 돈을 부쳐줄라치면 한사코 사양하는 동생. 곧 경기가 좋아지면 본인이 한국 땅을 밟겠다는 약속만을 남긴 채 하루하루 한국말을 잊어가는 동생이 언니 영자씨는 야속하기만 하다.

“한국말을 전혀 못하더라고요. 글씨는 어느 정도 읽는데, 말을 잊었어요…”

영자씨는 눈시울 속 그렇게 한참을 영구씨 얘기로 이어갔다.

영구씨 딸이 영국 유학도중 무리한 다이어트로 인해 심장마비로 돌연사한 사연이며, 아들이 장성해 일을 하게 된 것과 영구씨가 고추장이며 미역 등을 잘 먹는다는 소소한 일상까지.

“아직도 영구가 살던 동문2리 553번지에 기영구라는 사람이 사는 걸로 돼 있더라고요. 죽은 줄 알았던 영구가 살아 돌아 와준 것도 기쁜데 영구가 살아 있다는 기록이 존치된 걸 보니 감회가 새롭네요”

동생에 관해서라면 하나부터 열까지를 모두 알고 싶은 언니. 아픈 사연 가득 실은 빛바랜 흑백앨범이 아직도 그녀의 손에 쥐여 있다.

젖은 눈시울 소매로 훔치며 ‘이제는 꼭 만나고 싶다 내 동생 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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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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