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필서예가  림성만
문필서예가 림성만

민자영은 정말 쓸쓸한 여자다. 1851년에 태어나 마흔넷이라는 짧은 인생을 살다 간 여자. 그녀가 죽은 후 사람들은 그녀를 명성황후라 부른다. 경기도 여주는 그녀가 태어난 땅인데, 황후가 아니라 홀어머니와 함께 살며 집안을 걱정하고 훗날 아들을 걱정하고 남편을 걱정하다가 비극적으로 죽은 여자, 조선왕조 국모였던 민자영이다. 171년 전 민자영이 태어난 집에 들렀는데, 그 속에 소녀와 쓸쓸한 사내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다.

여덟 살이 되던 해 아버지가 죽고, 자영은 어머니와 함께 한양 친척 집으로 이사를 간다. 나이 열여섯에 민자영은 한 살 연하인 전주 명복과 혼례를 치렀는데, 시아버지 이름은 이하응, 그 유명한 흥선대원군이다. 남편은 훗날 대한제국 초대 황제가 된 조선 26대 왕 고종이다. 아비 없고 형제 없는 외톨이 계집아이, 대원군이 자영을 맞이한 이유였다.

하지만 아들 고종은 이미 한 궁녀를 사랑했고, 아들까지 있었다. 시아버지 대원군은 이 손자를 세자로 책봉하려 했지만 왕비는 질투와 배신감에 휩싸인다. 허울 좋은 사랑, 허울 좋은 왕비, 결국 세자 책봉은 무산됐지만, 남편과 시아버지는 왕비를 냉대했다. 세월이 흘러서 아들이 두 번 태어났지만, 병약한 손자들에게 시아버지가 명약을 처방해주었으나 모두 죽었기 때문에 어미는 더욱 시아버지와의 반목이 이어졌다. 그럼에도 권세가들을 모두 남편과 자기 주위로 끌어들이면서 시아버지를 몰아붙이는데, 1873년 왕위에 오른지 10년 만에 고종은 친정치를 선포하고 아버지를 권력에서 몰아낸다. 민자영이 구중궁궐에 들어간지 7년 만이었다. 이후 벌어진 권력투쟁 속에서 황후 민씨는 남정네들에게 너무나도 큰 여인이 되어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128년 전인 1895년 을미 8월 20일, 운명의 새벽이 왔다. 그 새벽, 일본 정부 지시로 경복궁에 있는 왕실의 거처 건천궁에 깡패들이 난입해 조선의 국모를 시해한 것이다. 깡패들은 이를 여우사냥이라 불렀는데, 그렇게 소녀 민자영은 불꽃같은 44년 삶을 살다가 비극적인 죽음을 맞았다. 여기까지가 우리가 알고 있는 명성황후, 아니 여자 민자영의 뒷이야기다. 소녀 민자영의 흔적은 경기도 여주 땅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데, 생가는 명성황후 생가 유적지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여름바람 부는 너른 땅에 기와집이 여러 채 서 있고, 한쪽에는 기념관이 자리 잡고 있다. 안채 마루엔 황후 영정과 병풍이 놓여 있고, 옆에는 서울에서 옮겨온 집 감고당이 있다. 고향을 떠난 작은 소녀 자영이 왕비가 될 때까지 살았던 집이다.

그녀가 책을 읽었던 별당 자리에는 ‘명성황후탄강구리비(明成皇后誕降舊里碑)’ 비각이 서있다. 비석 뒤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다. ‘拜手飮涕敬書(배수음체경서)’ ‘두 손을 조아리고 눈물을 삼키며 받들어 쓰다’, 살아남은 아들 순종이 썼다고 전한다. 기념관에는 민자영의 글씨 하나가 두 눈에 띄는데, 시원하게 획을 그은 두 글자는 ‘玉壺’(옥호), 시해당한 그 새벽 잠자리에 들었던 내실 이름이 옥호루다. 거친 궁궐 속에서 그녀가 평화를 누렸던 공간이었기에 스스로 대견하게 남긴 글씨라고 짐직해본다.

해남 대흥사 ‘대웅보전(大雄寶殿)’ 현판은 이 절을 빛내는 보물 가운데 하나다. 조선 후기 문인 원교 이광사가 쓴 것인데, 186년 전 제주도 유배 길에 대흥사에 간 추사 김정희는 대웅전 현판을 보고 “원교의 글씨는 촌스러우니까 떼어내라”고 타박했다. 엄밀히 말하면 추사와 원교의 글씨 보는 눈도 달랐고, 당색(黨色)도 달랐기에 생긴 일이다. 9년 뒤 유배에서 돌아오다 대흥사에 들른 추사는 자신의 교만을 깨닫게 되고 원교의 글씨는 다시 걸리게 된다. 유배 생활이 추사를 겸허하게 한 것인데, 대흥사 대웅전 옆 요사체에는 ‘무량수각(無量壽閣)’이라는 추사의 현판 글씨가 걸려 있다. 대웅전 현판과 함께 대흥사를 지키는 또 하나 명물이다.

지방의 절이나 서원, 종가(宗家)에 갔다가 잘 된 현판을 보면 건물도 다시 보게 된다. 중국 위나라 때 궁궐이 완공돼 현판을 걸어야 했다. 그런데 목수가 잘못해 글씨도 쓰지 않은 나무판을 건물 정면에 걸고 못을 박아버렸는데, 명필로 이름 높은 위탄(偉誕)이 나서게 됐다. 땅에서 25척 높이에 줄을 타고 올라가 매달려 세 글자를 쓰고 내려와 보니 머릿털이 모두 희어졌다고 한다. 현판 글씨가 그만큼 어렵다는 걸 전해주는 일화다.

광복 후 애국선열을 기리는 비문(碑文)은 대부분 국학자이며 민족지사인 위당 정인보가 지었다. 유관순 열사비, 윤봉길 의사비, 충무공 기념비, 효창공원 백범 기념비... 이것들엔 또 다른 공통점이 있는데, 하나같이 일중(一中) 김충현(金忠顯)의 글씨다. 위당은 비문, 의뢰가 들어오면 하나를 꼭 물었다고 하는데, “글씨를 누가 쓰는가” 만약 다른 사람이 쓴다고 하면 “나는 일중 글씨가 아니면 짓지 않는다”고 했다. 당시 일중은 20대 청년이요, 안동 김씨 명문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 사서삼경을 떼고 열세 살에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가문의 전통을 이어받고 고금(古今)의 서예(書藝)를 깨쳐서 ‘일중체(一中體)’를 완성했을 뿐 아니라 김응현·김창현 두 아우와 함께 20세기 한국을 대표하는 서예가 삼형제로 유명하다.

내게도 많이 부족하지만 나름 현판 글씨를 의뢰받아 30대부터 쓰기 시작했는데, 더듬어보면 평양조씨 「숭모사」, 숭실대학교 「한국 전통문예연구소」, 태안향교 「명륜당중건기」, 태안군청 「태안애」, 「옥파 이종일 기념관」, 「옥파 이종일 체험관」, 충남도청 「해양건도」, 원북 「정포루」, 근흥 가의도 「가의정」, 고남 가경주마을 「시래정」, 「벽단정」, 「보효정」, 「만리포사랑 노래비」, 「만리포 연가」 시비, 「정의로운 태안경찰」 비, 태안군 궁도협회 「소성정」 비 등이다.

문기(文氣) 가득한 글씨가 건물을 살리는 시대가 있었다. 그런 걸 귀히 여기는 안목과 정신의 품격이 있었기에 가능했으리라. 우리 시대는 과연 후세에 자랑스러워 할 만한 문화재를 얼마나 많이 남기고 있는 걸까 생각해본다.

SNS 기사보내기
태안미래
저작권자 © 태안미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