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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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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청년 한국화의 거장
태안미래  |  tanew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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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2.11.10  09:5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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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필서예가 림성만

무대에서 생을 마감하는 것은 연극배우들의 최대 꿈이다. 화가와 서예가도 매한가지다.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붓을 쥐는 것을 하늘의 복으로 여기는데, 인생 100세 시대, 우리 삶도 ‘만년 현역’을 지향해야 할 시점이다. 무엇을 하기에 너무 늦은 나이는 없기에 누구나 말한다. ‘형편이 나아서, 나이가 많아서’라고 하지만 인생에선 지금은 늘 적기이기 마련, 조선후기 최고의 화가로 84세로 생을 거둔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의 삶이 그랬다.


「당대를 풍미할 천재의 탄생」 

겸재의 본관은 광주(光州)다. 아버지 시익(時翊)과 어머니 밀양 박씨(密陽 朴氏) 사이에 2남1녀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선대 집안은 전남 광산(현 광주광역시) 나주 지방의 사대부였다. 뒤에 경기도 광주로 이주했고, 고조부 때 서울로 옮겨왔으나 몇 대에 걸쳐 출세하지 못한 가난하고 지체가 변변하지 못한 양반가였다. 다시 말해 몰락한 영반 집안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어려서부터 그림에 두각을 나타낸 겸재는 서울의 양반가에서 태어났지만 14세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마저 여윈 까닭에 집안 형편상 과거 공부에 전념할 수 없었다. 
겸재의 출생지는 현재 서울 종로구 청운동 89번지 경복고등학교가 위치한 북악산 서남쪽 기슭이다. 그의 그림 중 대중에 가장 잘 알려진 ‘인왕제색도’와 같이 인왕산을 배경으로 한 그림이 많은 것은 그의 근거지가 바로 인왕산 일대였기 때문이다. 겸재는 인근에 살던 안동 김씨 명문가인 김창협, 김창흡, 김창업의 문하에 드나들면서 성리학과 시문을 수업 받으며, 이들 집안과 깊은 인연을 쌓아갔다.
안동 김문은 그를 후원했고, 겸재는 감사의 뜻으로 김문의 주거지인 ‘청풍계(淸風溪)를 여러 번 그렸다. 청풍계는 정선의 그림 중에도 가장 걸작으로 손꼽힌다. 지금도 청풍계가 위치했던 곳에는 ’백세청풍(百世淸風)‘이라는 글씨가 남아있으며, 겸제는 안동 김문의 후원과 더불어 국왕인 영조의 총애를 받았다.
예술에 상당한 조예를 지니고 있던 영조는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꼭 호로만 부를 정도로 그 재능을 아끼고 존중했다고 한다. 1733년 영조는 겸재를 경상도에서 가장 경치가 좋다는 청하현감으로 임명했다. 겸재의 나이 58세 때였다. 65세 때에는 현재 서울에 편입된 경기도 양천현령에 임명되어 서울 근교의 명승들과 한강변의 풍경들을 화폭에 담았다. 1747년에는 금강산 여행을 다녀온 후 ‘해악전신첩(海嶽傳神帖)’을 남겼다. 어릴 적에 붓을 손에 든 겸재는 84세에 이르러 죽음이 그의 손에서 붓을 떨어뜨릴 때까지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겸재는 38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관직에 나가 70세까지 관의로서 봉직했지만 공직 경력만 보면 화려하다 할 수 없다. 하지만 경화세족들, 다시 말해 서울에 기거하며 벼슬을 독점하다시피 한 가문들이 모여 살던 인왕산과 백악산 주변에 살면서 당대를 이끌어가던 문인, 관료들과 막역한 교류를 했다. 시대 조류를 그 누구보다도 잘 읽을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가 만들어갔던 것이다.


「노력으로 자신만의 화풍을 완성하다」


겸재는 평생 전국 각지의 뛰어난 경치를 찾아다녔다. 당시 뛰어난 경치를 찾아가는 여행은 세련된 도시 취향과 국제적인 신문화(新文化)에 열린 자세를 가졌던 경화세족 인사들을 중심으로 유행하였다. 이들은 18세기의 새로운 국제정세와 확대된 세계관을 직시하는 현실적 감각과 문화 취향을 가지고 있었다. 현실적이고 경험론적인 입장을 강조하고 성리학의 변화를 추구한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 인간과 자연계 사물의 본성이 같다는 이론)을 주장했던 이들은 문예에서도 ‘천기론(天機論)을 제기하며 시화(詩畵)를 변화시켰다. ’천기론‘은 17세기 이후 예술계를 휩쓸고 있던 비현실적이고 관념적이며 실재하는 대상과 경험의 중요성을 주장한 예술론이다.
천기론은 구체적인 방법론으로 뛰어나게 훌륭한 경치를 직접 답사하고 그것을 기록할 것을 제기했다. 겸재와 주변 문인들이 금강산 등 전국 각지의 뛰어난 경치를 자주 답사하고 많이 그린 이유다. 새로운 조류에 민감했던 겸재는 자연을 직접 대하고 현장에서 일어나는 흥취를 경험하기 위하여 전국 각지의 명승을 찾아 평생 수없이 여행을 했다. 산을 마주할 때마다 현장 스케치로 대상을 실감나게 그리기 위해 애썼으며, 평생 쓰다 버린 붓을 모으면 붓 무덤을 이룰 것이라는 말이 전해질 만큼 붓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수없이 사생하고 연구하면서 겸재는 자신만의 화풍을 탄생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겸재는 실경의 모습은 때로는 똑같이, 때로는 적당히 변형시켜 재구성하였다.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실경을 묘사하는 겻보다 현장을 대면하였을 때 느낀 화가의 감흥과 진경의 분위기를 화가의 입장에서 해석하여 대상과 화가의 일체됨을 표현하고자 한 천기론적인 예술관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이전 중국 그림책(화보)을 전범으로 삼아 관념적으로 그렸던 산수화에서 비로소 벗어난 것이다.


「새로움을 받아들이기에 주저함이 없었던 화가」


실질적으로 17세기 초기부터 조선에 유입되기 시작한 명·청대 각종 화보(畵譜)의 영향은 막강했다. 비교적 이른 시기에 들어온 것은 고병(顧炳)의 ‘고씨역대명공화보(顧氏歷代名公畵譜, 약칭 고씨화보, 1603년)’, ‘당시화보(唐詩畵譜)’, ‘십죽재서화보(十竹齋書畵譜, 1627년), ’십죽재전보(十竹齋箋譜, 1644년)‘, 그리고 청나라 초 1679년과 1701년에 두 단계에 걸쳐 완간된 개자원화전(芥子園畵傳)’ 등이다.
문화는 흘러오고 흘러가게 마련이다. 요즘 미국의 대중음악이 K-팝으로 소화돼 다시 세계로 흘러나가는 양상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겸재는 중국의 남-북종화를 종합적으로 소화해 내는 조선의 진경산수를 그려낸 인물이다. 겸재의 진경산수화가 중국인들마저 매혹시켰던 이유다. 새로운 문화는 그렇게 만들어진다. 문화에는 그래서 우열도 원조도 없기 마련이다. 분명한 것은 조선의 산수화도 겸재를 통해 새롭게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겸재는 천지자연, 음양의 조화를 논한 ‘주역’ 공부를 통해 우주와 자연, 인간의 삶을 깊이 연구하고 그 안에서 자신의 좌우명을 찾아냈다. 이같은 깊은 학문적 식견은 진취적인 새로운 길을 가게 만들었다. 주역의 음양조화와 음양대비 원리를 화면구성에 적용한 것이며, 중국 남방화법의 기본인 묵법으로 음인 흙산을 표현하고 북방화법의 기본인 필법으로 양인 바위산을 표현하는 참신한 방법이다. 작품 ‘금강대’는 금강산 표훈사 북쪽 만폭동 안에 있는 석대를 그린 그림이다.
푸른 안개가 감싸고 있어 아득함을 더해주는데, 마치 금강대 자체가 푸른 하늘에 떠 있는 신기루 같기도 하다. 금강산 일만이천봉을 가슴에 품고 살았던 겸재가 손바닥 들여다보듯 금강대의 모든 것을 이상화시켜 표현한 것인데, 붓의 사용을 최대한 절제하면서 금강대가 지니는 신비롭고 아름다운 모습을 완벽하게 추상화하고 있다. 어느 평론가는 “주역의 묘리에 통달하고 진경사생에 평생 골몰했던 80대 노대가가 아니면 이룰 수 없는 추상의 경지”라고 평했을 정도다. 
우리는 겸재를 통해 ‘삶의 기술’로서 지혜로운 나이듦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된다. 평생 겸손한 선비로 새로운 사람을 만나거나,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에 주저하지 않았다. 경화세족과의 적극적인 교류로 새로운 문물을 배우고자 했던 자세가 이를 말해준다. 익숙함에서 벗어나 새로운 것을 배우면 배울수록 세상이 더 잘 보인다는 이치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열린 자세가 절실한 시대, 겸재가 이 시대의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도 새로움에 늘 열려야 하는 까닭이다. 새로운 시대정신에 화답하는 것이 ‘영원한 청년’이 되는 비결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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