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필서예가  림성만
문필서예가 림성만

큰 물줄기가 없는 곳에서 살다보니 문득 가을 강이 그리워지는데, “날개가 있는 새는 허공을 날아오르되 떨어지지 않고, 공중에 떠 있다 해도 그곳에 멈추지 않는다”(대품반야경) 했습니다. 무상한 강물은 그와 같을 것인데, 한순간도 머물러 본 바 없이 더 낮은 바다로 향하되 강물은 늘 그 자리에 있고, 하늘에 하나인 달이 일천 강에 한결같이 제 자취를 남기면 남기는 대로, 둘러친 산색이 고우면 고운 대로, 흐린 날이면 암암한 하늘 빛을 그대로 조신하게 되비쳐 보이니 색(色) 쓰며 가을걷이를 기다리는 곡식도 장하지만, 격이 다른 아름다움이 그 강물 속에 있을 것입니다. 
길에서 생각해봅니다. “이 산과 들의 진짜 주인은 땅과 물과 풀과 나무들이니, 우리는 그저 이곳을 잠시 빌려 살고 있을 뿐이다” 그렇습니다. 사람 사는 게 별거 아닙니다. 삶의 가치를 실현하는 것이 먼 데 있지 않고, 현실을 떠난 신비한 곳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고 저는 생각하는데, 그런 한편으로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도 아닙니다. 삶의 비생산적인, 저를 포함해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도 허다함을 볼 수 있습니다. 왜 나에게만 아픔이 있을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다르게 생각해보면 나보다 못한 사람도 얼마든지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살아가면서 나름대로 긍지를 갖아야 하겠고, 그 누가 뭐라 해도 나는 나니까 이제부터라도 그것을 알아야 하며, 쉽지는 않겠지만 “남이 죽어야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가 죽어야 내가 산다”는 것을... 
물론 거기엔 아픔이 동반할 겁니다. 그렇다 해도 견디는 건 아니, 견뎌야 하는 건 순전히 제 몫인데, 그걸 누가 대신해 줄 수 없기에 참아내야 합니다. ‘마스네’의 <타이스 명상곡>을 들어봅니다. 굴곡진 플라스틱 LP음반에서 들려오는 바이올린 선율이 잠깐이지만 저를 평온과 명상의 세계로 이끌어주는군요. 이 가을 이런 느낌이 있기에 살아가는지도 모르지만, 하긴 가슴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가을 음악을 그리워할 텐데, 저 혼자만의 생각일까요. 아닐 겁니다.
이제 제 자신이 서예와 그림공부 또한 달라지지 않을 겁니다. 언제부터인가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한 삶에 대한 열정부터 되찾아야겠다는 저의 의지는 가능한 것인가. 새로운 서예를 진실하게 창작하며, 삶 자체에 힘껏 부딪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살아가다가 삶의 주변에서 그 무엇을 찾아 제게 도움이 되는 새로운 느낌과 새로운 창작열, 저는 서예와 그림이라는 무기를 통하여 가능하면 새로운 감정의 표현과 소리로 얻어내고자 합니다. 
될수록 많은 사물, 많은 인간 군상들로부터 진실을 발견하고, 특히 주변 사람들의 고달픔과 외로움을 대신한 글과 눈을 돌려야하겠고, 저보다 더 춥고 가난하고 비천하고 외로운 사람들을 위해 마음의 터전으로 서예를 창작하려 합니다. 
지금도 저는 여전히 혼자이며 쓸쓸합니다. 그동안 많은 것들로부터 격리되었고 거절되었으며, 그러므로 저는 조금은 슬프고 외로우며 그리움도 있었지만, 생각해보면 많은 것들이 저를 떠났습니다. 하지만 저에겐 아직도 가야할 공부의 길이 남아 있고 만나야 할 사람들이 많고 해야 할 일들이 많은 것은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것은 제가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것이고, 서예를 창작하는 행위는 앞으로도 생명의 연소 행위와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무슨 일이든 모방과 기성의 틀에 갇히면 새로운 가치창조를 방해받기 마련입니다. 한가락에 떨면서도 따로 따로 소리를 내는 거문고처럼 서로 공유하면서 자기 세계를 가꿀 줄 아는 것이 모나지 않는 자기 개성의 표현일 것이라고 믿고 있는데, 때문에 저는 다시 앞을 향해 계속 나갈 것입니다.
비록 지치고 절망한다 하더라도 저는 앞을 보면서 작업을 계속할 것이며, 그러면서 내면세계의 보다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제 자신의 또 다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따져보면 고독에 비례하여 인간의 꿈은 위대한데, 그리하여 그 꿈은 죽을 때까지 이루지 못할 것이기에, 저는 여태껏 서예를 통해 정신의 미적 진실을 표현해왔기 때문에, 서예는 결국 저의 이야기가 됩니다. 제가 몸담은 현실은 제 자신의 삶과 현실의 가파른 모습을 알아가는 것, 그것을 서예로서 표현해야 하는 것이 저의 조그만 목표인데, 그러다보니 조금 벅찬 감도 듭니다. 
가난하지만 저는 후회 없이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가난한 사람들의 사랑이 있고, 제 행복의 결과가 서예로 태어났기 때문인데, 서예를 하되 진실되게 표현하는 참 서예가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뿐입니다. 물론 모든 사람들의 가슴에 서예라는 것이 와 닿으면 보석보다 더 귀한 것이 될 것이며, 살아가면서 부딪치는 여러 만남들, 이를테면 자연·인간·사상·기타 모든 것에 일어나는 문제들은 결국 제게 크고 작은 목마름을 주는 것들이었습니다.
보다 성실하게 저를 표현한다는 것은 객관적으로 한 인간의 삶을 바라보고 드러내는 일이므로 그것 하나만 정직하고 열정 있게 다루기만 해도 하나의 서예는 완결을 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저의 환경, 생각, 일상, 한 시대에 부딪치는 사건들, 운명과 창조, 이 모든 것들이 결국은 서예의 한 부분이며, 그 현실에 따른 저를 인식하는 것, 그리고 그 인식을 통해 보다 완성된 인간으로 발돋움하려는 정신이 곧 저를 이루는 것이기에 서예로서 이룬다는 것은 늘 저에게는 그 해결을 찾아나서는 외로운 일이었습니다. 
전통을 현대화하는 것은 한마디로 출구 없는 작업 같습니다. 전통서예라는 것이 전반적으로 계산되고, 구성이 있고, 합리적인 의도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물론 전통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무질서한 가운데도 나름의 형식은 있듯이, 즉흥적으로 붓을 놀릴 때에도 분명 형식이 담기는데, 다소 방만한 서예라는 예술 속에서도 현대적 구조에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 기승전결의 형식이 담겨 있습니다. 
서예는 한 시대와 사회, 그리고 그 속에 사는 인간의 표현입니다. 서예란 인간을 재평가하는 정신적 창조 행위이며, 창작을 통해 적극적인 인간과 사회상을 제시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강조하는 것이 서예가의 사명입니다. 따라서 저는 고통스러워도 감히 인류의 미래를 위해 긍지와 책임을 느끼며 창작을 게을리 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느새 서예공부 60년이 되어 10여 년간 준비한 서예와 그림을 태안문화원 전시실에서 10월 20일, 발표하려 합니다. 더불어 ‘바람 불어도 꽃은 핀다’를 한 권의 책으로 엮어 상재하오니 저를 알고 있는, 아니면 알지 못한다 해도 문화예술을 사랑하는 모든 분들이 함께 향유했으면 좋겠습니다. 끝까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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