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필서예가 림성만
문필서예가 림성만

인본주의(人本主義)와 실사구시(實事求是)에 뿌리를 둔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92~1836년)의 저술과 사상은 여전히 인류가 나아갈 방향에 대한 가르침이 되어주고 있다. 조선 실학을 집대성한 학자이자 교육자이며, 500여 권의 책을 쓴 저술가, 배다리와 수원 화성을 설계하고 거중기를 발명한 과학자, 시대의 아픔을 기록하고 전근대적 모순을 타파하고자 했던 개혁가로서 정약용의 삶은 21세기가 찾는 통섭형 지식인의 모습이다. 실천하는 양심으로서 다산은 인간을 향한 예의와 이용후생으로 지속 가능한 발전을 역설한다. 오늘날 다산의 소환이 낯설지 않은 이유이며 정약용에게 주목하는 이유다.

「고향 마재에서 학문을 품다」 다산이 태어난 곳은 두 물이 합쳐지는 곳, 두물머리 강가다. 두물머리는 전국에서 모인 사람들과 물건들이 드나들던 곳, 15세기가 되어 고향을 떠나기 전까지 정약용은 이곳 두물머리 강가 마재(마현) 마을에서 백성들의 생활을 속속들이 들여다보았다. 또한 가까운 수종사(水鍾寺)에서 글을 읽고 석호(石湖)에서 학문을 논하며, 유산(酉山)의 정자에 올라 형제들과 고향 풍광을 품평했다.
당시 정약용이 형제들과 고향 풍광을 읊은 「품석정기(品石亭記), 윤길산 유람 과정을 기록한 「유수종사기(遊水鍾寺記)」 등에는 아름다운 고향 두물머리의 풍경이 전해진다. 훗날(1801년) 이단죄로 경북 포항 장기로 유배가는 동중에 다산은 고향 강산을 그려 주막 벽에 걸어두고 「희작초계도(?作苕溪圖, 장난 삼아 초계도를 그려두고)」라는 시를 남기기도 했다. 다산에게 고향은 가장 비참한 생의 순간에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비집고 나와 그리움으로 사무치는 그곳이었다.
강마을 마재는 다산을 포함해 조선의 천재로 불린 ‘정약전, 약종, 약용’ 삼형제의 공향이기도 하다. 여러 고을의 수령을 지낸 명관을 부친으로 두고 고산 윤선도의 후손이자 공재 윤두서의 손녀를 모친으로 둔 다산의 형제들은 이곳 두물머리에서 뛰어난 학문적 기량을 잉태하고 키웠다. 또한 이곳은 큰형수의 남동생인 이벽(李蘗, 1754~1785년), 자형 이승훈, 조카사위 황사영 등 초기 천주교의 거물들이 자주 찾던 한국 천주교의 성지이기도 했다. 이처럼 다산의 고향 마을 마재와 생가 여유당(與猶堂), 두물머리 강가와 운길산의 수종사는 조선 후기 걸출한 실학자를 배출한 학문과 철학의 고향이자 한국 천주교의 시작을 잉태한 산실로 우뚝 서 있다.

「수원 화성, 백성을 만나고 실용을 실천하다」 1783년 22세의 다산은 소과에 합격해 성균관에 들어간다. 정조 임금은 성균관 유생 당시 정약용을 유독 아꼈으며 이를 통해 다산은 자신의 학문적 소양을 현실 정치 안에서 꽃피울 수 잇게 된다. 28세의 나이로 대과에 급제해 벼슬을 시작하게 되는 1789년부터 1800년까지는 관리로서 정약용의 전성기다. 규장각 초계문신으로 선발돼 학문의 깊이를 더하고, 과학기술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백성의 삶에 보탬이 될 수 있는 이용후생을 실천해나간다. 한강에 배다리를 설치하고 「성설(城說)」과 「기중도설(起重圖說)」을 지어 수원 화성 축조에 유형거와 기중기를 만들어 사용할 것을 건의해 실행함으로써 획기적인 비용 절감과 공사 기간의 단축을 가져온 것도 이 시기다.
33세에 경기 연천 지방의 암행어사에 임명돼 지방을 순찰하고 35세에 병조참지, 우부승지, 좌부승지를 지낸다. 36세에 황해도 곡산 부사로 나가 선정을 베풀고, 38세에 형조참의가 된다. 특히 곡산부사로 일하던 2년 동안 다산은 민정, 재정, 형정의 다방면에서 높은 성과를 올리게 되며 이때의 경험을 필생의 역저인 「목민심서」를 집필하는 데 기반이 되기도 한다.
관직 시절의 다산은 백성의 가난과 사회 모순을 눈앞에서 목격하고 관리자의 책임과 의무를 가슴 깊이 깨달으며, 민중의 삶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실천적 방안과 정책을 적극적으로 실천하고자 한다. 또한 다산은 젊은 시절 풍류에도 무심하지 않았다. 지금은 터만 남은 서대문 서련지(西蓮池)에서 14명의 선비들과 풍류계 「죽란시사(竹欄詩社)」를 맺고 살구꽃과 복사꽃, 연꽃과 국화꽃 피는 풍경을 즐기고 한 해가 저물 무렵에는 매화의 만개를 즐겼다. 
패기만만한 관료로서 정약용의 당찬 삶의 궤적을 만날 수 있는 곳은 이 땅에 무수하다. 그중에서도 수원 화성은 다산의 과학 지식과 재능이 개혁 군주 정조와의 만남을 통해 만개했던 이용후생의 현장이다.

「강진 유배살이, 비로소 학문의 길을 얻다」 1801년 신유박해로 유배형을 받게 된 다산에게 이후 18년 동안의 유배 생활은 생의 전환기다. 포항 장기를 거쳐 강진에 자리 잡은 이 기간 동안 정약용은 학문적으로 괄목할 성과를 이룬다. 이 시기에 다산학의 축을 이루는 경세학과 경학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가 이루어지고, 500여 권에 달하는 저서들이 완성된다. 교육자로서 다산의 황금기 역시 이 시기였다. 황상, 정수칠, 윤종문 등이 유배지의 제자들이다. 이로 인해 다산초당은 조선 실학을 꽃피운 위대한 학문의 터가 되었다. 
다산초당뿐만이 아니었다. 강진의 곳곳은 다산에게 유배 기간 내내 백성에게 삶의 질을 들여다보고, 제자를 가르치고, 유불을 가리지 않고 학문과 문화를 교유한 터전이었다. 1808년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기기 전 유배 생활을 시작한 주막의 작은방 사의재와 강진읍 뒷산의 보은산방(고성사 안 칠성각)을 비롯해 혜장 선사와 인연을 나눈 백련사, 다산이 반했던 백운동(白雲洞) 별서정원(別墅庭園), 그리고 형 정약전이 유배 중이던 바다 건너 흑산도 등이 그곳들이다. 백련사에는 유불의 경계를 넘어 학문과 차를 나누었던 혜장 선사와의 우정이 이야기로 남았으며 지금도 ‘다산차’의 전통이 전해진다.
백운동 정원은 다산으로 인해 더욱 특별해졌다. 다산은 백운동 정원의 아름다움에 반해 함께했던 초의 선사로 하여금 그 풍경을 그림으로 그리게 하고 자신이 직접 글을 지어 「백운첩」으로 엮었다. 다산에게 형 정약전은 융배 기간 내내 그리움의 대상이자 학문의 조력자였다. 그는 동생이 새로 지은 책을 보내오면 정성을 다해 감수하고 세세한 의견을 보탰으며 정약용 또한 이를 적극적으로 따랐다. 강진은 이처럼 조선 실학의 터전이자 애민의 공간이었으며, 다산과 수많은 인연이 저마다 특별한 이야기를 탄생시킨 조선 문화의 산실이다.

「귀향, 유학자로 돌아오다」 1818년 57세의 다산은 해배되어 고향에 돌아온다. 해배 이후 고향 마재에서 보낸 18년의 시간은 신작, 김매순, 이재의 등 당대의 학자들과 담론을 넘어 학문을 나누고 유배 기간의 학문 연구를 체계화하는 시간이었다. 다산은 상서(尙書)를 중심으로 경학을 연구하는 한편 자신의 무수한 저술들을 개정하고 체계화한다. 그리하여 1818년 「목민심서」 48권, 1819년 「흠흠신서」 30권과 「아언각비(雅言覺非)」 3권이 완성되며, 1834년 「매씨서평」이 개정되어 10권 완성된다. 1822년에는 회갑을 맞아 「자찬묘지명」을 지어 자신의 삶을 정리한다.
또한 이 시절의 다산은 오랜 염원에 따라 남한강과 북한강 ㅈ루기를 따라 유람하며 조선 땅의 아름다움을 글로 남긴다. 59세와 62세, 두 번에 걸친 춘천 여행에서 다산은 고조선의 중심을 흘렀다는 ‘열수(洌水: 한강)’의 위치를 밝히고 춘천과 맥국·낙랑의 관계를 밝혀보려 했다. 당시 다산은 자신이 저술한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의 문헉고증학의 방법으로 직접 답사하며 조선 상고사의 한 부분으로서 춘천의 위상을 확인한다.
말년의 다산이 자신에게 이름 붙인 ‘열수옹’은 세상으로부터 비로소 자유로워지고 싶은 노학자의 바람을 드러낸다. 그럼에도 다산의 노년은 유학자로서 쉼 없는 연구와 검증을 통해 자신의 학문적 성과를 나날이 새롭게 완성해낸 탐구의 시간이자, 자연의 아름다움을 돌아보고 시로 승화시키는 한편 자신의 삶을 글로 정리한 치열한 수기의 시간이었다. 1836년 7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다산 행보의 중심은 그간의 저술들을 체계화하고 당론을 넘어 경학을 논하고 교유하는 것이었다. 누가 뭐라 해도 다산의 고향 마재 마을과 그곳의 중심 여유당이 조선 후기 치열한 학문의 고향으로 가장 먼저 손꼽히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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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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