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필서예가 림성만
문필서예가 림성만

이맘때쯤이면 내겐 연례행사로 찾아오는 것이 있는데, 별로 반갑지 않은 감기다. 이번에도 며칠간 혹독하게 보내면서도 다가온 봄을 생각하면 그래도 위안이 되는 것은 뭇 생명이 움트기 때문 아닐까? 바람 속에 간간이 봄 냄새가 난다. 추위를 유난히 타다 보니 저 멀리 느린 걸음으로나마 다가오는 봄의 기운이 반가운데, 굳어 있던 몸과 마음이 기지개를 켤 즈음, 기다리던 봄바람의 살랑거림을 느낀다. 우리네 인생 시작은 다르지만 끝은 정해져 있는데, 확실한 건 죽을 때까지 시간이 남아 있다는 사실뿐이다. 우리가 가던 대로 길을 가도, 아예 가지 않아도 상관없지만 가던 길을 벗어나 다른 길에 들어서는 순간 모험은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문득 시간에 떠밀려 살고 있는 나를 본다. 어김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가던 길을 벗어나 망설이던 발걸음을 내디뎌 볼 생각을 하니 마음 한편이 두근거리는데, 이런 가끔의 ‘벗어남’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예술과 밥벌이(?)를 오가는 현실에서 기억해보면 조금 암울하지만 나지막이 읊조려본다. “잘 그릴 수도, 잘 쓸 수도 있지만 좀 못 그리고 좀 쓰면 또 어때?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는 거지. 나는 외줄타기 곡예사야 흔들려도 괜찮아. 그냥 앞만 보고 천천히 걸어가기만 하면 돼. 외줄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거야. 음.”

고백하면 내겐 단순하지만 누를 길 없이 강렬한 세 가지 열정이 내 인생을 지배해 왔으니, 사랑에 대한 갈망, 지식에 대한 탐구욕, 인류의 고통에 대한 참기 힘든 연민이 바로 그것이다. 사랑과 지식은 나름대로의 범위에서 천국으로 가는 길로 이끌어 주었는데, 그러나 늘 연민이 날 지상으로 되돌아오게 했던 것도 겨울과 봄 사이에서 부정할 수 없음을 기억한다.

숯가마의 푸른 불빛을 보면 거의 환상적이지만 그 노고의 속은 보지 못하고 겉만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천삼백도의 뜨거움에도 꿋꿋이 견뎌내고 참나무는 마침내 백탄으로 변하는 것의 경이로움을 주고 살아가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생각해보면 나로서는 하찮은 인간이 되어지는데, 받을 줄만 알고 주는 것에 대한 인색함, 부끄러운 마음이 고스란한 것이지만, 받기는 했던가 가만히 기억하면 그것도 아니란걸 반추하게 된다.

짠한 이야기는 아니더라도 오늘 문득 느낀 단상을 옮기면서도 산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나는 매혹적인 여인의 침실을 훔쳐보듯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내 책상을 사모한다. 그것은 책상은 침대보다 훨씬 많은 사연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내 책상 위에는 마치 현행범인 양 문학 행위의 정사 현장이 그대로 드러나 있으며, 수많은 캐릭터가 엉겨 있고, 숨 가쁘게 돌아가며 상상의 공간은 어지럽게 포개져 있기에 하는 말이다. 내가 가장 사랑하고, 사적인 공간, 책상이 지금까지 써온 글에서 오늘은 주인공이게 해주고 싶다. 그것은 책상도 주인을 잘 만나야 고생하지 않는다는 소신에...

부모님 졸라 신사 정장이나 하얀 블라우스에 검은색 투피스를 마련하고, 굽 높은 하이힐도 산다. 지하철에 나붙은 “외모도 스펙”이라는 성형의과 광고도 예사롭게 보이지 않고, 친구들과 학교 앞 스튜디오를 빌려 모의 면접시험을 보며 말투와 걸음걸이까지 새롭게 해본다. 대기업 면접시험이 있는 날 새벽 서울 강남의 미용실은 머리카락 매만지러 온 취업 준비생들로 붐비지만, 취업 준비생은 지망 회사를 위해 모든 걸 할 자세가 돼 있는데 회사는 내게 친절하지 않은 것 같다.

“사회 윤리와 회사 이익이 충돌할 때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면접관 질문은 내가 예상한 그런 것들이 아니다. “홍어, 닭발, 돼지껍데기, 곱창 중 외국인에게 추천하고 싶은 음식과 그걸 추천하는 이유는?” “서울에 사는 바퀴벌레는 모두 몇 마리인가.” “한라산이나 백두산을 옮긴다면 시간과 비용이 얼마나 들겠는가”…. 때론 이런 질문들이 허를 찌르지만, 현실적으로 맞는 것인지?

중앙 일간지 1면에 서울 명동 어느 회사 앞에서 면접을 마친 여성 취업 준비생이 하이힐 벗어들고 휴대전화 통화를 하며 걸어가는 사진이 실려 있는 모습을 보니, 드러난 뒤꿈치 스타킹엔 구멍이 나 있다. 사진기자 이야기로는 그는 회사 현관을 나서면서 바로 하이힐을 벗었고, 사람 많은 명동 거리를 그렇게 200m쯤 걸었다고 한다. 평소 안 신던 하이힐이 얼마나 불편했을까. 그러나 하이힐보다 더 그를 힘들게 한 것은 사회에 진입하는 과정 자체일 것이다. 부디 이름모를 그에게 좋은 소식이 갔으면 좋겠다. 내 자식같은 마음으로 바라보는 그 뒷모습 한 장면이 취업 절벽에 막힌 젊은이들의 고단함과 절박함을 다 말하는 것 같다.

“아픈 것은 청춘만이 아니다. 무한 경쟁 시대에서 어느 세대를 막론하고 꿈과 목표를 가진 모든 사람은 열정과 기대로 아플 수밖에 없다” 그래서 격려와 위로가 필요하긴 한데 유행처럼 번져 있는 멘토링과 힐링(치유)이 답을 주진 못한다. 대신 평소 아픔의 이유에 대한 통찰과 사유를 가능케 하는 인문학 공부가 대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약의 효과는 단맛 나는 표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쓴 약재에 있는 것이니 쉽게 위로받지 말고 인문학에 제대로 빠져보라는 것이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지만 한 쪽 가슴은 여유(?)가 필요한게 아닐까.

포르투갈을 대표하는 정통 음악 ‘파두’에는 두 가지 이미지가 있다. 하나는 남학생들이 대학교의 검정 가운을 두르고 노래하는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항구 골목의 허름한 술집에서 노래하는 중년 여성의 뇌쇄적인 모습이다. 관광객들은 후자를 좋아하는 듯한데, 항구의 파두가 리스본에서 태어났다면, 대학생들의 파두는 ‘코임브라’라는 오래된 대학도시가 중심이다. 포르투갈 사람들은 파두에 흐르는 정서를 ‘사우파드’라고 말하는데, 한국 음악을 말할 때 ‘한(恨)’이란 말로 설명하는 것과 비슷하다. 가난하고 어려웠던 시절을 지나면서 만들어진 정서라는 것도 비슷하고 다른 언어로는 쉽게 번역할 수 없는 자기 나라 고유의 심성이라고 설명하는 것도 비슷하다.

물론 그 심성을 완전히 이해하진 못하지만 여행객에게도 분명 파두는 매력적인 음악이다. 이처럼 살면서 전혀 다른 상황이 닥쳐와도 그 상황을 긍정적 시선으로 이해한다면 취업의 절절함도 조금은 여유롭지 않을까. “열매는 결코 하루 아침에 열리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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