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필서예가 림성만
문필서예가 림성만

초아 선생님. 바다에 곱게 내려앉은 겨울을 보러 갑니다. 신두리로 정했습니다. “또 신두리에요, 고작 신두리에요”, 그렇게 말씀하실지 모르지만, 제 답은 “한 동네 점쟁이 영한 줄 모르는구먼”, “이웃집 큰 새악시 이쁜 정 모르는구먼”, 그렇게 밖에 달리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군요. 신두리 모래언덕으로 가는 길은 고요합니다. 김장이 끝나 할아버지 한 분이 길옆 집 앞에서 배추 겉잎을 시래기로 엮고 있는 모습이 수행승이 살아도 좋을 듯한 이곳은 공기마저 달라서 한층 차갑습니다. 어떤 면에선 긴장감으로 팽팽하고, 양쪽으로 거느린 낮은 산은 날개를 쳐 막 솟아오르는 듯합니다.

해마다 이쯤이면 지난 1년을 생각해 보곤 합니다. 문득 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지금껏 무엇에 크게 배반당해 본 기억이 없구나. 나름대로 복 받은 세상살이였구나. 위안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게 그럴 만한 덕성이 있을까. 되짚어 보았습니다.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유는 무엇일까요? 지난 10월 23일 초아 선생님과 함께 신두리 모래언덕에 다녀온 것을 기억하시는지요. 간단했습니다. 섬뜩한 깨달음이 가슴을 쳤습니다. 무엇인가를 진정으로 사랑해 본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마음을 다해 정을 주지 않았는데 빼앗길게 무엇이 있겠는가. 받기만 하고 갚을 줄 몰랐던 착취의 내 인생, 쓰디쓴 회한이 밀려 왔습니다. 자연과 사람, 무엇이고 참되게 젖어 들지 못하고 그림자처럼 서성대기만 한 허망한 여로….

초아 선생님. ‘직필인주(直筆人誅)요. 곡필천주(曲筆天誅)’라는 말이 있습니다. 올바로 쓰면 사람들에게 목 베이고, 그릇되게 쓰면 하늘로부터 벌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무릇 붓(筆)든 이들의 가슴을 섬뜩하게 할 경구입니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다는 언사에 이르러서는 참으로 참담하기까지 합니다. 글쓰는 일의 비극적 운명을 호곡(號哭)하고 있는 느낌조차 듭니다. 이 무시무시한 토막말은, 그러나 한갓 비유에 그치지 않고 인간 역사의 뼈아픈 진실을 거짓없이 드러낸, 그야말로 직필입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바르고 곧은 선비가 고난받지 않은 적이 있었던가요. 곡학아세(曲學阿世)하는 썩은 문사가 득세하지 않은 적이 있었으며, 세상 사람은 본시 그렇지 않던가 말한다면 심한 말이 될까요. 그러고 보면 이 경구는 인간 역사에 대한 절망적 조롱, 허무적 타매(唾罵)에 다름 아닌데, 역사 쓰는 일, 붓(筆)든 사람들에 대한 자괴적 비웃음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화두의 면목은 끝말에 있습니다. 곡필하여 뜬 구름같은 호사를 누린 이들은 결국 천벌을 받는다는, 한 시절 잠깐 즐긴 복락이 천추 만세의 영원한 죄악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이 여덟 자 단구는 역사를 쓰는 이들에게 목숨을 건 직필이냐, 천벌을 각오한 곡필이냐 중 택일하도록 강요하고 있습니다. 또한 세상이 아무리 어지러워도 역사에는 인간이 헤아리지 못하는 엄정한 하늘의 질서가 내재하고 있다는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아, 그러나 제 편한 목숨 다하면 세상이 끝나는 줄 여기는, 백치인 오늘의 우리들, 그 누가 하늘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초아 선생님. ‘맹물 먹고 이 쑤신다’는 속담도 있습니다. 이는 실속은 없으면서 젠 체하는 사람을 비아냥대는 말입니다. 또 반대로 아무리 궁색할망정 티를 내지 말고 본디 가졌던 체통과 위신을 지키라는 경구로도 들립니다. 그런데 다시 한 번 이 말을 곰곰이 굴려 보면 예기치 않은 깊은 속뜻이 우러나옵니다. 청빈을 들키지 말라! 그렇습니다. 청빈의 요체는 혼자서 맑은 경지를 즐기는 것입니다. 옛 선비들은 그래서 남이 청빈을 알아 버릴까 그걸 제일 걱정했습니다. 하여, 더러 거짓으로 때묻은 체하고, 거짓으로 오만한 척 했습니다. 양광지계(佯狂之計).

하지만 오늘날은 그게 거꾸로 됐습니다. 탐오(貪汚)를 들킬까 조바심하며 너도 나도 청빈을 내세웁니다. 오히려 더럽게 물든 사람일수록 더욱 더 소리 높여 청빈을 외쳐 댑니다. 이럴 때일수록 이율곡(李栗谷)의 <강호사품론(江湖四品論)>은 다시 새겨 볼 만 합니다. 강가에 낚시를 드리우고 있는 이가 네 명인데, 각기 속마음이 다릅니다. 율곡은 그 중 한 사람을 ‘유현(儒賢)’이라 부르고 다른 한 사람은 ‘은둔(隱遁)’ 또 한 사람은 ‘염퇴(恬退)’, 나머지 한 사람은 ‘도명(盜名)’이라 불렀습니다.

‘유현’은 낚시꾼 중의 최상품으로 세속과 강호간에 두루 의연한 대장부입니다. 세상에서 굳건히 뜻을 펴다 안 되면 군말없이 강호로 물러 나와 독서하며 노닐고, 또 세상이 자기를 필요로 하면 언제든지 달려나가 소신껏 경륜을 펴는 유형입니다. ‘은둔’은 완전히 세속을 버리고 신선 마냥 산간에 숨어 사는 청류(淸流)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염퇴’는 스스로 경륜과 학덕에 한계를 느껴 겸허하게 전원으로 물러나 자기 연찬에 매진하는 부류입니다. 언제든지 세상이 부르면 나아간다는 자세지요.

마지막으로 ‘도명’이니 이게 문제입니다. 말 그대로 이름을 도둑질하는 썩은 문사를 이르는데, 그의 낚시질은 순전히 위장입니다. 관직에 있으면서 시세가 불리해지면 잽싸게 짐을 싸 들고 낙향해 벼슬에 뜻이 없는 양 유유자적하면서 청명(淸名)을 쌓는 듯 행동합니다. 그는 관부의 동향에 마음 졸이며 임금의 부름을 학수고대하고 있습니다. ‘조명(釣名)’입니다.

초아 선생님. 만고의 흉수 한명회(韓明澮)도 말년에 압구정(鴨鷗亭)을 짖고 무소유를 노래했습니다. 그런데 염치없게도 정자에 “젊어서는 사직을 붙들고 흰머리로 강호에 노니누나. [청춘부사직 백수와강호·靑春扶社稷 白首臥江湖]” 운운하는 시를 붙여 놓고 청명을 낚시질했습니다. 이에 젊은 선비들이 편액을 떼어내고 “젊어서 사직을 기울게 하더니 늙어서는 강호를 더럽히는구나. [청춘경사직 백수오강호·靑春傾社稷 白首汚江湖]”로 고쳐 달았던가요.

이렇듯 우리네 세상에는 정명(正名)보다는 허명(虛名)이 늘상 많았습니다. 그러나 제 아무리 교묘히 맑은 이름을 훔친 자라도 엄정한 역사의 눈은 끝내 속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현대는 청빈마저 감추는 경지는 아예 상상조차 안 되고 과거의 순진했던 조명이나 도명 마저도 한사코 그리워지는 세태입니다.

초아 선생님. 다시 석양이 내립니다. 모든 자연은 이제 큰 나래를 펴 모든 것을 감쌉니다. 사람의 얼굴이 조금 처연해 보이는 시각, 그러기에 더욱 빛나는 건 사랑입니다. 말없이 눈빛만으로 작별을 하고 가만가만 모래 언덕길을 내려옵니다. 겨울 저녁, 고약합니다. 서로가 각자의 고독을 몽땅 들켜 버릴 수밖에 없는 이 투명한 순간, 싫습니다. 가야겠습니다. 이제 가서 도심의 뒷골목에서 가장 무도회나 또 한판 벌이겠습니다. 오늘 신두리 모래 언덕에서 생각한 겁니다. 멀리 떨어져 있지만, 초아 선생님. 아름다운 축배로 한 잔 하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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