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필서예가 림성만
문필서예가 림성만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고요, 그 어떤 악기로 연주해도 만들어낼 수 없는 소리가 침묵 아니던가? 고요하면 맑아지고, 맑아지면 선명하며, 선명하면 드러나고, 드러나면 눈에 안 보이던 것들도 다 보인다. 공부하면서 생각하는 것이지만 이 나이(?) 물구나무서기 백 번 해도 지금은 나보다 더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들을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다. 난 늘 다니던 길만을 다녔고, 늘 만나던 사람만 만났으며, 늘 마시던 술만 마셨다. 그러나 이젠 새 길을 찾고, 사람도 새로 만났으니, 술도 새롭게 바꿔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가끔 나이 들면서 찾아드는 이 평화가 분에 넘치는 건 왜일까?

 

난 내가 너무 많이(?) 가진 것이 아닌가 하고 되돌아보게 될 때가 있다. 그것은 부자여서가 아니라 남들이 하지 못하는 것을 하고 있으니 하는 말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실로 진실을 찾는 사람은 가루보다 더 잘게 부서지는 비참한 고통을 맛보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 정련과정을 거쳐 산산이 부서진 다음 다시 하나가 되는, 밤은 길지만 그래도 새벽은 찾아오니까.

 

나는 중요한 결정을 할 때마다 산을 찾는다. 물론 지금 시점에서는 건강이 허락되지 않아서 그리하지 못하지만, 산에 집중하다 보면 어느 순간 ‘현상 너머 본질’이 몸을 확 끌어당겨주기 때문인데, 여러 가지 고민 끝에 또 한 권의 책을 세상에 내놓으려 준비 중이다. 그동안 연구서와 수필집, 시집과 제대로 된, 사상적 논고(論考)로 공부도 해보고 펴냈어도 다소 글 내용이 무거웠는지 일반 독자에겐 어려웠겠지만 공부하는 과정에서 꼭 활자로 펴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정리 했던 거다.

나는 때론 말을 경멸하는 편이다. ‘왜’라는 단어가 삽입된다면 그것은 영혼이 없는 자연과 같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에 매우 서투르기 때문에 대부분 거짓말만 하거나 진실을 말할 순간을 놓쳐 버리는 우를 범하기도 했었고, 그래서 나는 문자의 세계를 사랑한다. 문학은 오락이기에 앞서 언어의 완성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믿으며, 또 하나, 음악은 언어의 경계가 소멸되니 문학의 형태라고 본다. 그러므로 그것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것을 논리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각자 다르겠지만 지극히 진부(眞否)하다고 볼 수 있다. 우선 그것이 무거우냐 가벼우냐 하는 문제도 그렇고 굳이 철학적 관점에서 보지 않더라도 이건 일파만파로 퍼지게 된다. 감각에서 지각 이외의 인식작용을 추려야 함은 물론이고 대상을 심오하게 적극적으로 분석할 줄 아는 관찰력과 전체적인 맥락을 짚어줘야 하는데 거기엔 추상적 상상의 발아가 있어야 하며 대상을 판단하는 입장에서 정신적 작용도 추가해야 하는 것이(정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유다.

 

그럼에도 대상을 마음속에 그리며 생각한다는 것은 즐거움이 아닐 수 없다. 아니 어쩌면 처절한 고통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여인이 가슴에 들어오면 어쩌겠는가. 잊혀지지 않고 계속 생각으로 남는다면, 이 양면성의 사유 앞에서 나는 또 하나의 딜레마에 빠지게 되는데 굳이 나누어 생각한다면 우선 즐거움을 따르기로 한다. 즐거움, 어떤 것이 즐거움이냐 하는 문제는 또 다른 정신적 고통인데, 세상엔 4만 8천가지 이상의 직업과 198개의 언어가 존재하는 현실에서 고찰한다면 고통이 아닐 수 없다. 그런 면에서 보면 즐거움이 반감되는 것인데 이것을 어떻게 승화하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작가 개인의 문제다.

 

작가에겐 추구하는 예술정신에 따라 관점이 바뀔 수도 있다. 내 입장에서 보면 역사는 그만두고 난초 한 점을 치는데도 이파리는 많아야 하는지 간결하게 해야 하는지 꽃잎은 홀수인지 짝수인지 농담(濃淡, 먹의 흐림과 진한 것)은 진하게 해야 하는지 중간인지 흐리게 해야 하는지, 화제(畵題, 그림을 그리고 내용에 맞게 글씨를 쓰는 것)는 어떤 내용을 적절하게 배치해야 하는지, 마지막으로 낙관(落款, 작품 끝에 인주를 묻혀 찍는 도장) 처리는 어떤 방향으로 마무리해야 하는지 고민의 연속이다.

 

자유로운 정신과 내 삶의 방식에 대한 자신감이 없을 때, 그것은 콤플렉스이고 열정을 잃은 예술은 혼을 담지 못한 모조품처럼 빛을 잃을 것이 뻔하다. 그러므로 내 자신이 글과 글씨와 그림 속에 풀어져 헤퍼보일지라도 나만의 자유로운 상상력을 심고 싶은데, 그 상상력에 글씨와 그림을 보는 이들의 상상력이 더해져 내 글씨와 그림이 단 한 점이라도 사람들의 가슴에 남는다면 부족한 예술가로 아니, 작가로 그보다 좋은 일이 어디에 있을까.

 

하지만 세상은 언제나 사고(思考)의 영역보다 습관의 영역을 강요하는 것 같다. 아니, 그것은 나처럼 단순한 사람들만 느끼는 자기 위안일지도 모르지만, 나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은 끊임없이 사고하고 연구하며 경쟁에서 이기는 법을 터득하기 위해 오늘 밤도 하얗게 새울 것이며, 세상의 속도와 발을 맞추기 위해 걸음을 늦추지 않고, 결코 세울 수 없는 인생열차처럼 몰아가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사유(思惟)는 과연 있는 것일까? 여기에서 포괄적으로 말하면 문제는 심각해질 수 있는데, 누구든지 보통적으로 고민이 내재할 수 있지만 내적인 표출은 다소 무책임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표출 방법은 전적으로 개인의 자유이며, 따라서 자유라는 것이 자기만의 자유냐 공통적인 자유냐 하는 문제는 답없이 논란에 휩싸이게 된다.

 

비가 내리고, 술은 내가 마시고 그런데 취하긴 바다가 취하는구나. 그래서 ‘사유와 즐거움’을 좇아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지극히 정신적 반론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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