붙잡을 수 없는 것이 세월이라더니 절기로는 ‘입동’(立冬)이 지나고 어느 새 ‘소설’(小雪)입니다. ‘작은 겨울’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여 보지만, 슬며시 찾아왔다가 올핸 제대로 기운을 펴 보지도 못하고 떠나가는 가을이 아쉬워 어느 바닷가를 찾아가 제 여린 가슴 속의 타다 남은 가을앓이를 풀어낼 것인가 며칠 동안 고민했습니다.
주린 배 신경 쓰지 않고 바다로 가는, 선창의 허름한 식당에서 혼자 저녁을 먹으면서 밥맛의 깊이를 아는 예술가가 아니면 육체 노동자일거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러나 삶의 어느 한 부분을 따로 나눌 수 없듯이 삶이란 예술이며 노동이 아닐까요. 바다, 제가 고대하던 바닷가에 이르러 첫 음절의 파도소리를 들을 때 가슴이 얼마나 설레이는지 아십니까? 오랫동안 꿈꾸었던 어떤 삶의 시간들이 이제 곧 자신의 눈앞에 펼쳐지게 될 때의 설레임과 꼭 같은….
파도 소리가 들립니다. 파도 소리는 듣는 사람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제가 듣기엔 무척 쌩쌩합니다. 지나간 시간들, 따뜻했으나 쓰라린 숨결들, 그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지만, 저 또한 거기에 휩싸여서 울진 않습니다. 그건 새로운 시각과 변화는 늘 우리 앞에 펼쳐질 테니까요. 저는 지금까지 이루지 못한 꿈들 때문에 아파하지 않으렵니다. 꿈은 지니고 있는 데서 그 광휘가 있기 때문인데, 갯벌들이 그 무수한 오폐물들과 악취를 모아 그곳에 모든 바다 생물들의 낙원을 만들 듯이, 세상살이에서 구토하고, 쓰러지고, 아파하고, 쓸쓸해한 모든 기록들이 기실은 우리가 꿈꾸고자한 시간들의 한 집적이 되어가는 것을 지켜볼 수 있다면, 그 생명은 충분히 아름다울 것입니다.
지금 제 눈앞에 펼쳐지는 너른 갯벌이 좋고 갯벌 냄새를 이리저리 싣고 다니는 바람의 흔적이 참 좋습니다. 키 넘게 훌쩍 자란 갈대숲, 그러나 갈대들의 목은 안타깝게도 꺾여져 모두 같은 방향입니다. 바람은 가끔씩 갈대숲 사이로 들어오고 그럴 때 갈대들은 자신의 내면 안에 숨긴 낡고 오래된 악기의 소리를 냅니다. 그렇다면 그들, 갈대들은 어디서 오고 어디로 갈까... 고개 숙이고 끝없이 걸어가는 갈대들의 행렬은 어쩌면 저와 많은 부분이 닮아 있습니다.
오랫동안 보이지 않는 바람을 사랑했습니다. 그 속에 서 있으면 지상의 모든 쓸쓸한 것들의 얼굴이 투명(?)하게 보기 때문인데, 생각하면 바람보다 더 쓸쓸한 존재들도 없겠지요. 흔적도, 꿈도, 미래도, 빛깔도, 목소리도, 아무 것도 없으니까요. 짐작하시겠지만 제가 바람을 사랑하는 제일 큰 이유는 자유롭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 중에 아무도 그 사실을 모르는 이는 없겠지요. 그런데 세상 사람 중에 그만큼 자유로운 존재가 없다는 것도 또한 사실입니다. 많이 쓸쓸할 때,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고 가슴속이 텅 비어 지상 위의 집착들로부터 벗어날 때 드디어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보지만 외로움이 찾아올 때, 사실은 그 순간이 인생에 있어 사랑이 찾아올 때보다 더 귀한 시간일지도 모릅니다. 그건 쓴 외로움을 받아들이는 방식에 따라 한 인간의 삶의 깊이, 삶의 우아한 형상들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완행버스 차창 밖으로 비쳐지는 시골길의 한적함을 느끼면서 순탄하게 아스팔트 길을 달리다가 해변 마을에 다다르니 약간의 바다 냄새가 들려옵니다. 가까운 곳이지만 서해 의항리(소원면) 포구 마을을 찾는 것은 태어나고 이번이 다섯 번째 왔던 것으로 기억 되는데, 파도 소리는 유독 많고 곱습니다. 저는 야트막한 언덕 위로 올라가 수평선 너머 아니, 불과 1킬로미터도 안되는 바다 건너 신두리(원북면) 해변을 보고 있는 중입니다.
서해 깊숙이 들어앉은 작은 마을, 저는 지금 의항리 포구 바닷가에 서 있습니다. 역설적이게도 의항리 포구 마을을 전체적으로 볼 수 있는 곳은 이곳이 아니라 바다 건너 신두리 마을입니다. 신두리 모래 언덕에서 보면 왼쪽 끝 바다 건너 마을인 셈이죠. 포구 옆 둑방 비닐하우스 안에서 차가운 바람을 피해 옹기 종기 모여 앉아 바다에서 따 온 굴을 쪼던 우리네 할머니들은 핍진한 삶에 대한 그리움과, 어머니의 따뜻한 그리움으로 굴 껍질 속에서 스멀스멀 배어 나오다가 모두들 집으로 돌아가고, 갯가에는 이제 저와 밀물만 남았습니다. 아니 남은 게 더 있긴 했습니다. 글과 글씨를 쓰고, 노동을 하고, 음악을 듣고, 자유와 정의의 획득을 위한 얼마쯤의 투쟁을 하고, 아, 그런데 왠지 그런 모든 풍경들이 다 쓸쓸하게 다가왔습니다.
의항리 포구에서 처음 노을을 보았을 때, 저는 모래밭 위에 정중히 무릎을 꿇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보석들의 광휘를 용서한 것 같은 그 빛... 저는 그 빛의 섭리에 대해서도 생각해봅니다. ‘노을 빛이 다 스러지고’난 뒤 갈대밭은 어둠에 잠기며 아름다운 노을이 펼쳐진 뒤의 저녁 어둠은 정말 부드럽습니다. 자세히 보니 푸르스름한 쪽빛의 기운이 어둠 속을 흐릅니다. 작은 파도도, 새들의 날갯짓도….
사람의 무지와 욕심으로 바다를 메워 육지가 된 곳에 작은 바람을 만나 가볍게 흔들리는 갈대의 모습을 바라보니 갈대들은 웅덩이 물속에 아래쪽을 깊게 담그고 있습니다. 물과 갈대가 만나는 지점에 물 비늘 하나 일어나지 않는데, 이 신비하고 고요한 어둠의 시간이 저는 참 좋습니다. 단순한 어둠이 아닌 낮 동안 이 모래밭과, 갯벌과 바다 위에 꿈을 부린 많은 생명체들의 영상이 그 어둠 속에 새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추사의 친구였던 자하 신위(1769~1847)는 일찍이 ‘글을 쓰려고 종이와 붓을 찾음은 어리석은 일. 시냇가 모래밭에다 손으로 쓰기에 너무 좋으니’라고 얘기했거니와 예전에 이 바닷가 모래밭에 닿았을 때처럼 해변을 걸으면서 생각에 잠겨 봅니다. ‘바닷물은 먹물이고 모래밭은 한지’로 여기면서….
한없이 고요했던 시간들 속에서 저는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법을 하나하나 배우고 있습니다. 저의 글과 글씨들이 천천히 날갯짓하는 것을 보았고 가능한 그 날갯짓이 더욱 격렬해지기를, 세상에 대한 더 깊은 연민과 지혜와 열정을 지니기를 바랐습니다. 그리하여 제 글과 글씨가 어떤 사랑스럽고 순정한 광기의 언덕에 이르러 고단한 날갯짓을 멈추고 여유롭게 비행하며 새로운 언덕을 다시 꿈꾸길 바라고 있으며, 따라서 침묵은 날개의 다른 이름이길 기다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