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안향토문화연구소 소장 박풍수
태안향토문화연구소 소장 박풍수

필자는 살아오면서 회한(悔限)을 느꼈던 일들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우리나라(조선인) 사람들의 생각과 표현방법이 희망적이기 보다는 비관적인 표현을 많이 써왔다고 생각한다. 50여 년 전에 읽은 이어령 선생이 쓴 글 ‘흙속에 저 바람 속에’ 라는 책을 읽은 기억을 되살려 보면 서양인(西洋人)들은 ‘새가 노래한다’로 표현하는데 반해서 우리나라사람들은 ‘새가 운다’로 표현했고, 아침인사가 ‘굳모닝’ 즉 좋은 아침인데 우리나라의 서민들은 ‘진지잡수셨어요?’가 보편적인 인사말이었다. 선친의 생신날 아침이면 나는 우리 집을 제외한 15호(열다섯집)를 뛰어다니며 아침 식사하러 오시라고 전했다. 남자어르신들이 모두 모이시면 선친이 기거하시던 넓은 방에 큰 상을 펴놓고 귀한 생선과 두부와 함께 박대, 어묵 등을 푸짐하게 차려놓고 어머님이 정성껏 빚은 막걸리를 한 잔씩 쭈-욱 드시고 식사를 시작한다. 식사를 빨리 끝내고 쉴 틈도 없이 아저씨들은 논과 밭으로 일하러 나간다. 때마침 모를 심는 시기였다. 많은 세월이 지난다음에 알게 된 일이지만, 서양 사람들의 생일잔치(파티)는 하루의 일이 끝난 후 예복으로 갈아입고 음식과 술을 먹고 난 뒤에 음악을 들으며 춤을 추며 즐긴다는 사실을 알고 왜 ‘우리나라사람들은 생일잔치(?)를 아침식사로 하고 서양 사람들은 저녁에 할까?’하고 생각했는데 나이가 든 후에 그에 대한 나름대로의 생각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우리나라사람들은 필자가 어렸을 때 끼니거리가 없어 저녁밥을 거르다시피 하고, 밤에 잠을 자고 일어나 일터로 가야 하는데 아침밥을 제대로 먹지 못해서 생일잔치(?)를 아침식사로 했다고 나름대로 생각했고, 서양인들은 식사를 부족하지 않게 하여 하루 종일 일을 끝내고 여유 있게 저녁에 모여 생일 파티를 열었다고 필자 나름대로의 판단을 했다. 그 당시에는 나무를 때서 밥을 지었기에 굴뚝으로 연기가 높게 피어올랐다. 연기가 피어오르지 않으면 그 집을 쳐다보며 어른들은 저녁식사를 못하는 집으로 알고 걱정 어린 한숨을 쉬었다. 서양(西洋)이라고 다 잘 살지는 않았겠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국가 중에 미국에서 원조물자로 보내준 분유를 학교에서는 점심시간에 끓여주었고 C-레이션을 반장이 배급제로 나누어 주었으며 초등학교시절 공책과 연필을 원조 받아 나누어 주었는데 질이 너무 좋아 놀랬던 기억이 있다. 이제 조선시대로 돌아가 보자. 서양인들은 산업혁명을 이루어 군함과 대포를 만들어 시장개척에 나섰다. 일본도 조총을 만드는 기술을 습득하고 전 국토를 통일한 다음, 임진왜란을 일으켜 7년 동안 국토와 국민이 말과 글로 표현 하지 못할 만큼 고통을 겪었다. 문화재는 일본으로 거의 가져가고 한국인들을 죽이고, 노예로 끌어가고, 귀와 코를 베어 소금에 절여 도쿄로 보내 귀 무덤과 코 무덤을 만들었다. 지금도 임진왜란의 원흉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받드는 신사(豊國神社)앞에 이 무덤이 존재하고 있다. 어려서부터 듣고 자라면서 들은 말로는 일본인들은 덩치가 작아 왜(倭)X이라 불렀고, 한때는 대마도 성주로부터 조공을 받았다고 한다. 우선 임진왜란을 간단히 생각해보자. 일본은 원래 총이 없었는데 일본근해(近海)를 항해 중이던 ‘포르투갈’ 선박이 표류하게 되자 일본인들의 환심을 사기위해 조총 두 자루를 일본정부에 바쳤는데 약삭빠른 일본인들이 조총을 복제하여 임진왜란 시에 조총으로 조선을 침략했으나 조선은 대나무로 만든 화살로 대적하니 요즘말로 게임이 될 수 없었다. 눈치 없는 대마도 성주가 조총 한 자루를 선조에게 바쳤는데 이를 연구하여 복제할 생각은 하지 않고 군기시(軍器寺, 무기 등을 보관 제조하던 곳)에 잠자고 있었다고 선조수정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이를 두고 천추유한(千秋遺恨)이라 했던가? 부국강병(富國强兵)이 국치(國治)의 기본이거늘 이렇게 좋은 기회가 왔는데도 이용하지 못하였고, 양반의 자식들은 군포(軍布)를 바치고 군대에 가지 않았으니 왕궁을 지키는 몇 백 명의 군사와 지방에 있는 약간의 군사로는 조총으로 무장한 15만여 명의 왜군을 감당할 수 없었음은 당연한 결과다. 치국(治國)의 도를 잊은 선조는 명나라국경으로 도망가기에 급급했다. 늦게나마 전국에서 봉기한 의병들이 맹활약하여 누란(累卵)의 위기에 처한 조선을 구해냈다. 이런 와중에도 정규해군인 이순신 장군의 혁혁한 전공은 세계역사에 길이 남아있다. 이순신 장군이 없었다면 아마도 대한민국이 지금까지 이어져 왔을지 장담할 수 없다. 당대의 걸출한 인물 류성룡이 쓴 ‘징비록’의 말미에 보면 ‘이러고도 나라가 망하지 아니 하였음은 하늘의 도움이다’라고 썼고, 다음은 세계역사상 자기민족을 노예로 만들어 인간이하의 취급을 한 나라는 많지 않다. 미국도 남북전쟁으로 노비의 제도를 없앴지만 조선은 노비문서(노비족보)가 있어 노비의 자식들은 대대로 노비가 되었다. 다른 나라의 경우 남의 나라를 침략하여 잡아온 포로들을 노비로 삼았지만 조선은 자기국민을 노예로 삼았으니 왜놈들에게 나라를 빼앗길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나라의 주권을 빼앗기자 분함을 참지 못하고 자결한 분들도 많지만, 일본에 빌붙어 후작, 백작, 남작직위를 받은 숫자는 68명(8명은 거부)인데 아이러니컬(ironical)하게도 왕실과 연계 되는 사람들이 많았다. 자결을 해도 시원치 않을 터인데 왕실의 사람들이 귀족의 작위를 받고 은사금(恩賜金)을 타 먹었다니 나라가 망한 것도 당연한 일이 아닐까? 그의 후손들은 지금도 호의호식(好衣好食)하면서 거리를 활보하는데 반해, 독립투사의 후손들은 하나같이 가난을 면치 못하고 학벌도 낮은데 비해 친일파의 후손들은 고학력이라고 기록되어있다. (‘친일과 망각’ 중에서 퍼옴) 특히 이회영의 6형제들은 전 재산을 정리하여 (현시가 6억 원 제값으로 치면 2조 원) 서간도로 가서 독립운동을 주도했다. 이회영 선생의 부인이신 이은숙 여사가 쓴 ‘서간도시종기’에 보면 독립투사들이 찾아와도 대접할 것이 물뿐이었다는 회고록을 읽으면서 뜨거운 눈물이 흐르지 않을 자 누구인가? 위에 거론한 대표적인 인물들을 제외하고도 전국적으로 일본에 아첨하여 군수(郡守)이상의 직함을 얻은 친일파는 부지기수이고 아직도 후손들의 기세가 당당하다. 친일파 명단 속에 필자의 청소년기에 문학에 눈뜨게 해줬고, 감성을 불어넣어준 문인과 학자가 포함되었다는 내용을 알고 당시의 환상을 깨기 싫어 친일파명단을 보지 않기로 했다. 한편 해적선을 타고 온 일본인들이 야음을 틈타 조선의 백성들을 납치해 가는 일은 비일비재(非一非再)했고, 서산 군수는 해적들에게 쫓겨 부근의 군(郡)까지 피난 갔다는 기록도 있다. 마지막으로 관군과 왜군들에게 쫓긴 ‘동학농민군’들이 백화산으로 숨어들자 이들을 잔혹하게 학살한 장소인 백화산과 교장바위가 눈에 들어올 때면 분하고 원통한 마음이 폐부를 찌른다. 역사는 기록되어야하고 잊지 말아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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