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필서예가 림성만
문필서예가 림성만

명 다한 잎사귀, 몸을 던져 제 뿌리를 따스히 덮은 대밭에도, 이만하면 뜰에 옮겨 심어 볼만하지 않겠느냐는 듯 빛깔 고운 잎들을 떨구지 않고 찬 비 견디고 있습니다. 입동(立冬)은 하였으나 절기가 아직 소설에는 미치지 못했노라고, 송구하여 눈(雪)으로 내리지 못하고 물(水)로 내립니다. 유례없이 고운 단풍일 것이라더니, 한 철 나무 몸 키운 뒤, 스스로 제 소임을 다하고 있다가 본체와 이별하지 못하고 가지 끝에 잎이 말라붙은 그루도 숱합니다.

우리 산천에 가장 잘 어울리는 집은 뭐니 뭐니 해도 초가집인데 그것이 모두 사라진 시골은 삭막한 풍경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하루아침에 벼락치기로 세상을 뜯어고치니 메마르고 험악해져갈 수밖에요. 그래 놓고 사람들이 고작 한다는 말이 정서교육 하겠다고 난리입니다. 정서는 교육으로 이뤄지는 게 아니고 분위기로 길러지는데 네모꼴 세모꼴 뾰족뾰족한데서 무슨 정서가 길러질까요.

아버지가 농사를 짓고, 나무를 키우고, 하다못해 장작을 패던 것도 나에게는 자연의 작은 이치들을 깨닫게 해주었고 결국은 사람이 잘 사는 게 뭔가를 생각하게 했었습니다. 현대의 편리함, 편하면 편한 만큼 그 댓가를 치른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그런 걸 생각하면 지금의 생활이 꼭 발전이라고 할 수 있는 건지 반성해 볼 일입니다. 나무와 산은 1년 사철에 풍요와 가난을 고루 겪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오직 한 가지 풍요만을 쫓고 있습니다만 천지 만물에 두루 존엄함이 깃들어 있음을 알고 대접하는 사람이 참사람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가끔 삼라만상에 깃든 존엄성을 사람이 짓밟을 수 있느냐는 생각이 자꾸 드는데, 사람이 사람 아닌걸 귀하게 여길 때 비로소 자기 자신도 귀해지는 법이 아닐까요.

도연명이 도피자가 아닌 그 시대를 다른 의미에서 치열하게 살다 간 사람이었듯이 오히려 개인의 늪 속에 파묻힌 이 시대를 (감히)엄히 나무라고 싶은데, 철 따라 옷 바꿔 입는 일에 골몰하는 세상 사람들이 왜 ‘세상을 바꾸자’는 말에는 귀 기울이지 않는지 그것도 궁금합니다.

하긴 더 값진 승용차와 좋은 집에 인생을 건 사람들에게 세상을 바꾸자한들 과연 그 말이 먹혀들까요. 세상을 만들기 위한 근본은 사람인데, 새로운 형태의 사람들이 나고 크는 일이 세상을 바꾸는 일의 근본임을 나는 믿습니다. 근본은 사람이고 사람들이 모여서 그 문제를 풀어야 합니다. 그래서 인화가 제일이고 지리와 천시는 그 다음이 아닐까요. 그렇습니다. 결국은 사람인 것입니다. 밤늦게 책을 읽는 것도 나에게는 결국은 사람을 만나는 일입니다.

오늘도 화려한 아침입니다. 아침을 소중히 기다려 본 사람은 알 것입니다. 가을날 이른 아침 풀섶의 이슬에 발을 적시면서, 내가 정말 가고 싶어하는 곳이 어디인지에 대해서 생각해보는데, 그래도 내가 걸어가고자 하는 길을 아직은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 모든 것이 환영이었을지는 모르지만 지금 이 순간은 그것이 무척 절실했습니다. 그것은 손을 뻗으면 만질 수 있을 것 같은 거리에 있었고, 그 모든 것들은 내 곁에 아주 가까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내가 보았던 것은 그렇게 낭만적이었고, 사랑스러웠으며, 아침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투명한 햇살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해도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세상살이.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모든 것이 불확실한 상황입니다. 끝없는 상념 속에서 무책임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안온한 바다가 있는 곳으로 떠나려 합니다. 바다, “많은 것을 품은 가을 바다”가 보이는데, 적당한 바람에 일렁이는 물결과 포말이 보입니다. 바다에선 때론 허탈한 느낌도 들지만 그래도 작은 안위를 느끼면서 많은 것을 배우는데, 지금 차곡 차곡 그 느낌을 적어가고 있습니다.

멀리서 작은 아이가 바다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더 이상 들어가지 못하는 아이가 잠시 멈추어 선 곳에 물거품이 사라지고 파도가 더 이상 밀려오지 못하는 그 자리에서 아이는 지금 무엇을 보고 있을까? 거대한 바다와 작은 아이가 묘한 대조를 이루면서 바다의 풍경이 풍요로워 집니다. 마치 한 문장을 쓰고 나서 마침표를 찍는 것처럼 아이가 그렇게 바다의 끝에 서서 마침표를 찍어 놓고 있습니다. 사람이 있어서 아름다운 풍경이 있듯이. 그렇습니다. 저런 곳에 저런 모습의 풍광이 없다면 얼마나 삭막할까요. 사람은 정말 아름답습니다.

이 가을 나비들은 날아가 버리고 허공에 내려오는 햇볕은 할머니의 손등처럼 부드럽지만 힘이 없습니다. 겨울을 나기 위해 어디선가 날아오는 철새들처럼, 가을날의 상념들이 항상 그렇게 우리에게 날아오고 있습니다. 상처처럼 남아 있는 그런 이야기들을 품고 말입니다. 가을 꽃은 왠지 향기가 더욱 짙고 깊으며, 산에서 피어나는 산국, 구절초 같은 꽃들과 또 물에서 피어나는 물옥잠, 물 달개비, 어리 연꽃 같은 꽃들은 봄 꽃과 분명 다릅니다. 가을 꽃을 보면 꽃의 끝을 보는 것 같습니다. 봄 꽃이 꽃의 시작이라면 가을 꽃은 그 향기를 마감하기에 더욱 더 애잔하고 진합니다.

셔터를 눌렀습니다. 사진기의 한 부분인 금속의 셔터 소리 속에 물체는 고스란하게 갇혀 있다가 인화지에 뚜렷하게 떠오를 겁니다. 가 버린 아쉬움에 셔터를 계속 눌렀습니다. 작은 바람, 노을 빛, 늙은 어부의 피곤함, 돌아오는 길의 들꽃, 아무도 보아주지 않는 것들에 나만의 느낌으로 사진기 렌즈를 가까이 대고 속삭였습니다. 그것들은, 자연은 역시 위대했습니다. 인화지에 두드러진 모습으로 다시 올라올 때 그 모습은 결코 실망을 주지 않을 겁니다.

살면서 목적이 기준이 되면 ‘지금’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걸 생각해 봅니다. 살아가는 일 자체가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순간 순간의 존재 의미가 스스로에게 주어지는데 삶은, 살아가는 현장이어야 하며, 미래에 초점을 너무 맞추면 현재의 시간은 낭비가 되기 쉽습니다. 우리 삶의 한 컷 한 컷에는 괴로운 일과 즐거운 일이 따로 찍혀 있지만 인생의 필름에서는 한 장면으로 이어집니다. 살면서 행복만 있다면 인생의 드라마에는 박진감이 없기에 하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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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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