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필서예가 림성만
문필서예가 림성만

지난 초여름의 풋고추는 싱그러웠고, 초록 꼭지는 그대로인데 몸통색깔이 변한 홍고추는 그 강렬한 색의 대비에도 불구하고 아스라하기만 합니다. 이 가을에는 볼거리가 다양하지만 고추잠자리가 황금색을 띠기 시작하는 나락 위를 떼지어 날아다니는 모습을 보니 그나마 마음이 평화로워지는데, 그럴 때면 꼭 눈높이에서 알짱거리며 시야를 방해하는 하루살이에게도 관대해져서 함부로 손을 저어 쫓게 되지 않습니다.

모든 작물들이 탐스럽게 영글어 온 세상이 그득해지고, 그리하여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말하며 처지야 어떻든지 물색없이 흐뭇해하기 십상인 이 시기에 태풍 「오마이스」의 유례없는 홍수 피해로 전국 곳곳이 황폐화돼 있는 몰골이 안타깝기만 한데, 그럼에도 계절은 맞춤하게 좋아 청량한 갈바람이 상쾌하게 스치지만 왠지 그 결 속에서 시대의 불안과 어수선함이 보이는 것도 어쩔 수 없는 현실입니다.

혼자라는 것, 바람만 눈뜨고 있는 백화산 중턱, 붓을 잡고 풀리지 않을 때 또는 눈이 가물거릴 때 잠깐 산중턱을 혼자 어슬렁거린다는 것, 해무에 휘감겨 있는 크고 작은 섬들을 바라본다는 것, 그것은 외로움이며 외로움은 제가 즐기는 유일한 오락(?)입니다. 외로움을 한껏 더 즐기기 위해 저는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습니다만 몇 번의 길다란 심호흡으로 제 두통은 말끔히 가시었는지, 어깻죽지의 결림도 가시고 눈의 피로도 씻겨 바다가 한눈에 내다보이는 백화산을 뒤로 일어납니다.

걸었습니다. 백화산을 내려올 때는 태안초등학교를 거치게 되는데, 예전엔 어린이들이 가을운동회를 준비하느라 열심이었습니다. 줄다리기도 보였고, 무용, 농악 등. 그러나 이젠 그 어린 시절의 행동들은 꿈에서만 볼 수 있다는 것, 나이를 먹는다는 것,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운명인지도 모릅니다. 아니 당연함인데, 그런데 왜 이리 서러운지, 이제 그것은 차치하더라도 너나 할 것 없이 자유가 있는 것인지. 자고 일어나면 집값 땅값을 비롯해 물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뛰는데 서민의 한 사람으로 말하면 요즘 시절이 수상합니다. 이때 정치꾼들은 무엇을 하는 것인지. 속된 말로 이꼴 저꼴 보려니 미치고 환장하겠는데, 정말 왜들 이러는지 모르겠습니다.

농사짓는 친구가 변덕스런 날씨에도 불구하고 올해도 들깨를 반 가마쯤이나 이미 거두었고, 막불겅이 섞인 고추도 다 따 손질을 끝냈다고 합니다. 겨울을 날 시금치와 삼동초는 진작 씨를 뿌려 두었지만, 시금치와 삼동초는 웬만큼 자라야 겨울 추위를 견뎌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텃밭의 호박은 아직 누런 몸을 그대로 풀섶에 궁글리고 있는데, 바다가 가까운 이곳 태안은 산이 얕으니 반면에 하늘이 넓습니다. 달 없는 밤에는 별이 쏟아질 듯이 떠서 눈을 서늘하게 하고, 보름달은 그것대로 그 너른 하늘을 온전히 채웁니다. 문 창으로 비쳐 드는 달빛 생각만 해도 설레이는 건 그나마 풍요로운 가을 때문이 아닐까요.

남이 보기엔 평온해 보이는 농촌 살림살이는 겉으로 보기와는 달리 고달픔의 연속입니다. 그래도 그들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을 원망하면서도 천직이 농사꾼인지라 다른 길이 없는데, 한 해의 수확과 수입은 한정되고 씀씀이는 당연히 커지니 이건 도무지 계산이 맞지 않는 겁니다. 친구만 해도 아이가 셋인데, 장성해서 아직 출가하지 않은 자식이 있어 한숨만 쉬고 있기에 현실을 외면할 수 없는 처지이니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가을, 이 계절을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하지만 가을이 풍요롭다 해도 한 알의 곡식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그 친구와 비교해보면 반성 또 반성해야 할 것들이 정말 많아 부끄럽기만 합니다. 제 부친께서도 큰 농사는 아니었지만 농사로 살아갔기에 친구한테는 미안한 마음이 항상 머물러 있습니다. 그 친구를 보면서 세상에 나는 물건을 사람만이 독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배워가고 있는데, 새와 곤충이 없이 사람만이 산다면 얼마나 삭막할까요. 그런데도 세태는 혼자 먹겠다고 야단이니 권력이란 것도 돈이나 농약만큼 독합니다. 그런데도 그걸 몇몇이서 독식하면 금방 끝장나는데도 한사코 독차지하자고 몸부림치는 현재 정치꾼들의 꼴이 가관입니다.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풀을 뽑는 일이기도 한데, 친구는 그렇게 살아가고 있지만, 곡식은 뿌려야 나지만 풀은 옛날부터 지난해까지 떨어진 풀씨가 수없이 돋아납니다.

부정적인 역사의 유습들이 우리의 전진을 가로막듯 잡초는 수없이 돋아나는데, 그걸 뽑아주지 않으면 곡식이 오그라지고 시들어 녹아 버립니다. 부정적인 요소들이 얼마나 끈질기고 뿌리가 억센가를 말해 주는데, 끈질기고 노회한 세력과의 대응은 그에 합당한 방법이 준비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바람직한 성품이란 어떤 것일까. 봄 날씨처럼 포근할 줄도 알고 한여름 같은 정열도 불태울 수 있어야 하며, 가을 날씨처럼 쌀쌀맞고 쓸쓸한 기상도 지녀야 하고, 엄동설한의 냉엄함과, 비타협적인 철저한 자기 확립, 이런 걸 두루 갖춰 그때 그곳 따라 그렇게 사는 사람이 진짜 자연인이 아닐까 여겨 봤습니다만, 저는 언감생심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살고 있지요.

가을인데도 불구하고 작품 하기가 어렵습니다. 건강 때문인 것도 있겠지만, 그런데 문득 스치고 지나는 건 평범하면서도 진리가 있는 것은 멀지 않은 가까운 곳에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제 서예공부, 가능하면 멋있게 쓰지 말자 삐뚤어지더라도 거짓말 하지말자.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붓에 먹을 묻히자. 그리곤 눈감고 호흡하다 눈뜨고 호흡 멈추었을 때 단번에 써내자. 그렇게 생각하고 써낸 것이 천자문의 첫 구절 천지현황(天地玄黃)입니다.

천지현황 ‘하늘은 위에 있어 그 빛이 검고 땅은 아래에 있는 고로 그 빛이 누르다’ 했습니다. 정말 우리를 보고 있을까요. 하긴 ‘고당 주의식’ 선생은 “하늘이 높다 하고 발 져겨 셔지 말며 땅이 두텁다 해도 내 조심을 하리라”고 했던 말이 생각나는군요. 그렇습니다. 사실 우리는 지금 살얼음판 같은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세월이 만들어 주는 빛깔이 있습니다. 손때라는 것도 있는데, ‘과정은 조급함보다는 느긋함이고’, 그 과정은 갈수록 좋고, 과정에서 삶은 이루어지고 결과에선 삶을 그르칠 수도 있는 것 같아 인생도 삶도 과정이지 결과는 아닌 것 같은데, 제 글을 읽으신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동의할지 그것도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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