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필서예가 림성만
문필서예가 림성만

늘 푸른 모습으로 정지해 있을 것 같던 여름은 그 절정에서 돌연 쇠퇴의 기미를 드러내며 퇴각했습니다. 한여름 내내 머리 위로 퍼붓던 폭염, 하얗게 타오르던 햇볕에 압도되었던 저는 그 돌연함에 조금은 어리둥절해집니다. 한해살이풀들은 씨앗들을 예비한 채 덧없이 누렇게 탈색한 잎을 달고 시들어가며, 폭염에 시달렸던 바위들은 푸슬푸슬 부서져 내리고, 밤은 더욱 더 깊어지지만 낮은 자꾸만 짧아집니다.
이 가을은 모든 사람들을 여름의 익명성으로부터 본래의 자기로 돌아오게 하며, 더위를 피해 이리저리 몰려다니던 군중들 틈에 끼어 잃어버렸던 한 개체로서의 ‘나’를 찾게 됩니다. 그 찾음은 제 자신에 대한 새삼스러운 발견에 다름 아닌데, 아, 내가 여기 있었구나! 나는 누구인가, 나는 살면서 무엇을 꿈꾸었던가. 보다 많은 자유를, 보다 많은 행복을 꿈꾸며 방황하고 괴로워했던가. 그러나 그건 시효가 지나버린 연극 티켓과 같은 것이 아닐 것입니다.
이 가을에 저는 살이 너무 꽉 차 있기보다는 조금은 비어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살려고 합니다. 물론 건강을 잃어버린 뒤의 생각 일지도 모르지만, 추분(秋分)을 얼마 남겨 놓지 않은 이즈음 지상에 내리쬐는 햇볕의 의미는 결코 녹록한 것이 아니거늘, 하늘이 주는 절기의 겸허함 속에 이즈음의 하루 햇볕은 벼를 익히는 소중한 시간입니다. 자연 절기로는 이러한 때를 백로(白露)라고 하니 생각해 보면 기막힌 실바람이 살갗을 스칩니다. 아득히 먼 곳에서 바람이 불어와 잔잔한 제 가슴을 흔들어 놓는데, 그렇다고 어찌할 바 모를 정도는 아니련만 얄미울 정도의 이 가을 햇볕이 풍요로워서 싫지는 않습니다.
지금 제 가슴속에 가을이 살포시 들어옵니다. 하지만 그 어느 계절보다 짧은, 그래서 이 가을은 더 아쉬운지도 모릅니다. 밭에 서 있는 수숫대만 보아도 왜 그리 가슴을 울렁거리고 산천에 펼쳐진 풍경은 왜 그렇게 멋있게 보이는지. 저 혼자만의 생각인지 모르지만, 아직도 감성적인 것이 남아있어서, 그래도 이 가을이 넉넉해서 좋은 걸 어떡합니까.
햇볕 물러난 자리에 가을바람이 불어오고, 바람 불어 결대로 흔들리는 건 우주의 당연한 이치입니다. 마침내 소중한 비밀로 가득 찬 밤이 되었습니다. 어느새 한가위도 가까워지고 마음도 풍요로운 이 밤. 새벽이면 시원하게 열릴 저 하늘을 내다보는 제 가슴은 벌써 충만으로 가득해 나프탈렌 냄새가 짙게 배어 있는 지난해의 옷을 찾아 꺼내 입고, 이 밤 창가에 앉아 풀벌레의 울음소리를 듣습니다. 가만히 귀 기울여 들어보니 여름철에 듣던 풀벌레의 울음소리와 가을철의 그것은 분명하게 구분되는데, 우는 종류도 다르고 울음소리도 다릅니다. 여름철 풀벌레의 울음소리가 극성스러웠다면, 가을철의 그것은 끝이 가늘고 왠지 쓸쓸한 것은 저 혼자만의 심사 때문만은 아닐 겁니다.
풀벌레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사람들은 과연 어떤 생각을 할까 고민해 보지만 저는 여름철의 풀벌레 울음소리에서 왕성한 생명의 활력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가을의 그것에서는 제가 잘 알지 못하는 저 너머 세계의 어떤 기미들을 감지하곤 하는데, 제가 한낱 미물의 울음소리들 속에서 절대와 신성에 대한 어떤 전언(傳言)들을 감지하는 것은, 감동하기 쉬운 민감한 영혼의 소유자이기 때문일까요. 아닐 겁니다. 그 풀벌레들은 “나는 곧 내가 태어나기 이전의 세계로 돌아가리라”라고 제게 속삭이는 것 같습니다. 그 속삭임은 범속한 일상사에 너무 분주하여 제가 자주 망각하는 존재의 근원에 대한 사유의 세계로 저를 홀연히 끌고 갑니다.
문득 낯선 거리나 골목을 지나고 있을 때 어느 집에선가 열린 창 틈으로 새어 나오는 고전음악의 귀에 익은 선율은 저의 발길을 멈추게 합니다. 그 선율은 저를 무한정한 그리움의 포로가 되게 하며, 제가 겪은 20대 초반의 어둡고 힘들었던 시절의, 그럼에도 낭만이 배어 있었던 음악 감상실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너무 많이 굶어야 했던 그 시절의 궁핍과 절망과 불안들은 차라리 얼마나 사치스러웠던 시간이었는지, 모든 위대한 예술가가 지나간 길에는 젊은 시절의 빈곤과 고독과 청춘이 그의 발자취로, 혹은 그의 위대함을 더욱 극적인 것이 되게 해주는 배경으로, 아름다룬 꽃처럼 피어 있는 법입니다. 그것들은 그가 뒷날에도 얻었을지도 모를 세상에 떨치는 명성이나 막대한 재산 따위로는 살 수 없는 소중한 것들입니다. 아직은 이른 제 청춘에의 회고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고전음악에의 열광적 탐닉과 함께 가난이었습니다. 그걸 누가 알까요.
하지만 그렇게 주저앉고 말 수는 없습니다. 저는 참다운 서예인이 되려합니다. 저는 회복기의 환자처럼 잠시 아픔이 있었을 뿐, 저는 서예인이기에 인간의 아픔을 가장 늦게까지 대신 아파해야 하는 사람이며, 서예인은 인간의 슬픔도 가장 늦게까지 대신 울어야 하는 사람입니다. 서예인은 영원히 늙지 않아야 비로소 서예가입니다! 가끔 신음도 하면서 술독에도 빠집니다.
거기에 비추어보면 요즈음엔 예술가들이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 이런 현상을 어떻게 이해할까요. 최근의 예술이 가슴에서 터져 나오지 않고 머리에서 짜여져 나오는 일과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이백, 두보 등 중국 문학의 근본에 술이 얼마나 깊이 관련돼 있는가는 관심 있는 예술가들이 더 잘 알 것입니다. 술의 고전적 의미를 모른 채 예술적 절실성이 감소된 소시민으로 전락해가는 저보다 더 젊은 예술인들에게 강권하는 건 아니지만 술을 마셔보라 말하고 싶습니다.
삶은 우연성, 하찮음, 자질구레함, 의미없음의 비탈 속에서 필연, 저 운명의 본원성, 근원과 진정성을 향해 열린 매혹, 힘과 의미로 충만된 세계에 유혹된 넋의 불꽃이어야 합니다. 여름의 무성한 햇빛에 번쩍이는 잎사귀를 녹색 갑옷처럼 입고 하늘을 향해 수직으로 서 있는 나무들은 하나의 커다란 녹색 불꽃이었습니다. 그 녹색으로 타오르는 불꽃은 분출하는 넋의 광휘로 충일한 삶의 한 현상을 보여 주었지만, 그러나 그것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오래 전부터 저는 불확실한 것들과 싸우며 “삶의 규칙은 스스로 세워야 한다”는 내적 기율 위에 제 삶을 세우려 노력해 왔습니다. 늙는 것이 두려운 것은 더 이상 저의 주체적 선택과 의지에 의해 제 삶을 살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늙게 되면 어쩔 수 없이 피동성 위에 놓여지게 되는데, 생각해 보면 늙는다는 것은 얼마나 끔찍한 일이던가요. 그럼에도 늙어가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가끔 중얼거려보는 단어가 있는데, ‘절망’ 그것은 삶의 심연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참으로 절망한 자들은 그 극한에 이르면 성자들과 같이 겸허해집니다. 그들은 결코 나태와 쾌락으로 도망가지 않으며, 서둘러 나태와 쾌락으로 도피하는 자들은 절망한 자들이 아니라 포기한 사람들입니다. 나르시시즘, 혹은 자기 사람의 헛구렁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사람들, 그들은 쉽게 ‘절망’을 입에 올리지만, 절망이 정말 무엇인지 조차 모릅니다. 진짜 절망한 자들을 만나기란 쉽지 않은데도, 그저 많은 사람들이 ‘절망’한 척할 뿐입니다.
깊어가는 초가을 밤 아직 걷지 못해 답답한 마음으로 두서없이 넋두리 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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