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필서예가 림성만
문필서예가 림성만

꽃이 피어나려는 작은 소리/그 꽃 지금 바라보지만/꽃이 피어나기까지 얼마나 아팠을까/꽃엔 곱다란 향기 있지만/향기에 너무 취하지 말고/날카로운 가시도 기억해야지/그것을 무시한 채/가까이 다가가는 건 아닌지/그래도 꽃은 참 예쁘네

 

고개를 들어보니 벌써 한여름 속에 들어와 있습니다. 창 밖에 심었던 대나무(烏竹)가 지난 봄엔 파릇이 새순을 주더니 어느새 이파리가 피어나고 줄기는 푸른빛을 멀리한 채 조금씩 검은빛으로 변하면서 튼실하게 살이 오르고 있습니다. 세상 돌아가는 이치가 다 그렇겠습니다만 새로운 이파리가 돋아나면서 새롭게 자리를 잡아가고 묵은 이파리는 가지에서 하나 둘 땅에 떨어져 거름으로 변해 자기역할을 다하고 흙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면 신기할 뿐입니다.

그나저나 꽃비는 언제 그칠지 저는 아직 모릅니다. 꽃비 그치고 일곱빛깔 무지개가 떠오를지. 남쪽 대나무골에서 살고 있는 ‘고수’처럼 ‘경’이로운 그녀도 나와 같은 생각일까. 꽃은 꽃으로만 피어야 하는데, 아직 가슴엔 불꽃이 남아 있는데 그 불꽃 어떻게 식혀야할지. 가끔 향기가 있는 사람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아시겠지만 향수의 향기가 아닌 사람냄새나는 그런 향기를 말하는 건데, 그런 사람을 만나면 참 기분이 좋습니다. 산들바람 타고 다가온 꽃향기처럼 그럼에도 계절은 한여름이 되어 한여름 밤 꿈을 꾸어 봅니다.

무거운 것과 가벼움에 갈등할 때가 있습니다. 꽃만해도 그렇습니다. 동백꽃과 요즘 절정인 능소화는 통째로 떨어지는데, 매화는 눈발 날리듯 흩날리죠.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무거운 사람과 입이 가벼워 참지 못하는 사람이 있지요. 제가 아는 대나무골 여인도 입이 무겁습니다. 그 여인 여러 가지 가슴아린 속사정도 있겠지만, 그래도 저한테는 친근(?)하게 대해주는데, 그래도 가볍게 보이지는 않아서 가끔 속있는 이야기를 편지로 전하는데, 그 여인은 문자만 보낼 뿐인데, 그게 그 여인의 세상사는 방법인지 모르겠습니다. 각자 생각은 다를 수 있으니까요.

법정 스님이 생전에 ‘무소유’라는 책을 엮어 냈지만 과연 무소유가 가능할까. 속세의 인연을 끊은 사람이 아니더라도 번뇌는 있는 법. 오늘 한지 펴놓고 대나무 한폭을 그렸습니다. 주제넘은 말이지만, 이리보고 저리봐도 괜찮은 작품(?)이 나왔습니다. 제멋에 사는 거지요. 누가 말리겠습니까. 사실 버리려고 생각해도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왜냐면, 버리는 건 물건이고, 비운다는 건 마음인데, 어찌 그것이 쉽겠습니까. 인간은 욕심과 욕망으로 사는 건데, 그것을 다 버린다면 공허뿐이지요. 그렇다면 어디까지가 적당한가가 정점인데, 정말 어렵습니다. 지금 제 마음이 그렇습니다.

‘살면서 덕을 바라지 말고, 차라리 베풀어라’ 어릴 적 아버지한테 들었던 단어인데, 경험한 사람은 알겠지만 한 번이 문제지 시작하면 멈출 수 없는 것이 그것입니다. 덕을 물질로만 보지 말고 따뜻한 말 한 마디가 얼마나 가슴을 훈훈하게 하는지. 우리에겐 남아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상대를 이해하고 베푸는 것입니다. 인생에 1막 2장이 있던가요. 오직 1막 1장입니다.

지인에게 가끔 ‘어떻게 사느냐’고 물어보면 ‘정(情)으로 산다’고 말합니다. 그럴 때 저는 ‘말도 안 되는 그런 소리 그만 하세요’라고 말하지만, 정으로 태어난 사람은 그런 말 하지 않습니다. 가수 조용필이 발표한 16집 노래 중에 ‘정’의 첫 소절에 ‘정이란 무엇인가’라는 구절이 있는데, 정말 정이란 무엇일까요. 사는 것 쉽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상대를 포용하지 못하면서 정을 말한다면 그것은 위선이 아닐까요. 철저하게 제 생각입니다.

사람들은 그냥 사는 것 같지만 그게 아닙니다. 건강을 위해서 산에 많이 오르지만 나무로 겹쳐진 숲을 무시하고 지나치는데, 우리는 나무에 기대어 살아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고마움 알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나무가 뿜어내는 산소의 가치를 모른 채 나무가 아니더라도 옆에 있는 사람의 존재를 망각하고 사는 것은 아닌지 한 번쯤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그나마 저는 대나무골의 그 여인을 생각할 수 있으니 다행인거죠.

이제 한여름입니다. 더구나 코로나19가 심상치 않지만 휴가 안내문만 남기고 사라진 도시, 폭염주의보의 빈 거리엔 매미 울음만 가득합니다. 나뭇잎들이 만드는 모자이크의 그늘 쪽으로 ‘초록은 나의 종교’라 적힌 초록 글씨 티셔츠의 여자가 아이 손을 잡고 걸어갑니다. 초록 샌들 초록 가방 초록 시계, 모자도 초록으로 닮았습니다. 비를 모르는 어린 구름이 아이 앞에 편지지만한 그늘 한 장을 흘리는군요. 아이의 작은 손이 그걸 접어 비행기를 날립니다. 나무들은 그나마 초록 지붕을 가진 여름날의 작은 정거장, 여자와 아이가 나무 안으로 사라지고 가지 위의 초록 벌레 나비도 버스에 옮겨 탑니다. 한때의 초록 교도(草綠敎徒)들을 싣고 버스는 출렁출렁 뭍에 가 닿는데, 바로 섬입니다.

가만히 눈감으면 생각나고 보고 싶은 사람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저는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노모를 모시고 전통 사업을 하고 있는 당찬(?) 그 여인은 내적으로는 분명 여리게 보이는데, 사회 구성상 외적으로 강해 보이는 모습일지 모르는데, 이 사회에서 남성과 여성으로 나누는 분리법부터 잘못된 것이라 생각하고 있지만, 우리는 아직도 그릇된 습성이 배어 있어 정말 적절하지 않습니다. 외적인 것보다 인성이 먼저 아닐까요. 그럼에도 그것을 부추기는 사람이 있는 것을 보면 아쉬움이 남습니다.

7년 동안 번데기로 있던 매미의 단 7일간 세상살이에 대한 소리, 더 들어가서 보면 그 7일 안에 짝을 찾아 후세를 남기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인데 그런 걸 한가한 사람들은 자장가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한쪽에서 힘겹게 고단한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은 매미가 요란하게 울어 대는 것은 잠을 설치게 하는 곤충으로밖에 다른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진초록 이파리 뒤에서 7일 동안이지만 그것은 울음이 아니라 환희와 희망을 안겨 주는 소리라고 생각합니다. 또 하나의 신비스런 생명이 잉태되는 환희의 노랫소리는 장엄한 자연의 부분일 뿐입니다.

올여름 더위는 유난합니다. 그러나 혹심한 더위 끝에는 아직 고개 숙이게 할 영근 이삭은 달지 못한 채, 제 안에 무게를 두지 못하고 그저 곧추서서 제 존재를 떨치는 푸른 벼 밭이 대풍년 이라는 선물로 바뀌어 지기에 견디는 거죠. 구름처럼 무심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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