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내 잠을 자던 개구리들이 땅 밖으로 나온다는 경칩도 지났습니다. 하지만 경칩이 아니어도 개구리는 나와 있고 물 속에 알까지 있는 것을 보니 진정 봄이 다가오고 있는데, 어제는 비까지 촉촉이 내려 메말랐던 대지는 더욱 활기차 보여 무거웠던 마음은 훨씬 가벼운 몸으로 바뀌는 느낌입니다. 무엇보다도 옷차림이 조금은 가볍게 되었으니 하는 말입니다.

모처럼 시장엘 가 보았는데, 마침내 토종 매화 나무를 보았습니다. 그동안 몽글진 매화가 몇 번 인가 집 앞까지 왔다가 쫓기듯 돌아가곤 했는데, 머지않아 문을 열고 집안 가득히 들어와 여린 제 가슴속 심장까지 도달한 것 같습니다. 매화는 겨울이 혹독할수록 향기를 짙게 내는 ‘군자의 덕’을 지녔으며, 꽃봉오리가 얼어서 도저히 꽃이 안 되겠다 싶을 때 더욱 그윽한 향기를 내어 세상을 아름답게 합니다.

또 가지를 적당히 잘라 줄수록 몸 전체의 균형을 아름답게 잡아가는데, 이는 정다산(茶山)처럼 선비가 귀양 갈 것을 무릅쓰고 직언하여 훗날을 위한 업적을 남기는 것에 비유할 수 있는 덕을 기려 매화(열매가 아닌 꽃)와 그 향기를 가까이 하고 완상하는 것 만으로도 큰 즐거움으로 삼았던거죠.

그러나 매화(매실)에 관한 뒷사람들의 인식은 크게 오염돼 있습니다. 굳이 오늘의 세태로 들여다보지 않더라도 사람들은 꽃이나 향기를 귀중히 여기는 게 아니라 매실의 양과 수익에만 촛점을 맞추고 매실음식을 팔고 먹는 것으로 직성을 풀려고 하는 것을 볼 때 조금은 안쓰러운 감이 듭니다.

이는 우리 나라에서 일본으로 전해진 매화(매실)가 이제는 거꾸로 일본의 양산 위주 개량매(왜매)로 이 땅에 들어와 저질러 놓은 일제 ‘매실 상업주의’ 의 노림수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만 그렇다해도 왜매는 꽃과 열매가 가지에 빈틈없이 덕지덕지 달려 있으며, 향기는 두 말할 것 없이 꽃 주위에서만 머물다 금방 사라집니다. 이에 비해 우리 토종매는 꽃이 띄엄띄엄 달리고 열매도 작으면서 야무질 뿐 아니라 향기는 동구 밖까지 퍼지는데 은은한 그 향기를 못잊어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입니다. 하긴 그런 향기를 아무나 취할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토종매’로 위장한 ‘매실 상업주의’ 때문에 지금 선현들이 토종매와 더불어 이룩해 놓은 격조 높은‘매향정신(梅香精神)’ 은 저 멀리 밀려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군자의 덕’ 에 관해 생각할 겨를마져 빼앗아가고 있는 것인데 그나마 매화나무가 눈물겹도록 반가운 것은, 엄동설한이 채 끝나기 전에 우리에게 따스한 봄 기운을 전해주면서 삶의 아름다움을 상기시켜주는 미덕 때문입니다. 이럴 때 “매일생한불매향(梅一生寒不賣香)·매화는 추위에 얼어 지낼지언정 향기를 함부로 팔지 않는다” 는 지조 있는 시 한 구절이 생각납니다.

일찍이 선현들은 아호에 매화의 매(梅)자를 즐겨 넣었습니다. 잠깐 생각나는 대표적인 인물이 1905년 이른바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당시의 관료들을 규탄하는 시를 짓더니 1910년 일본의 강제 점령에 나라를 잃게 되자, 네 수의 절명시와 한 통의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매천 황현(梅泉 黃現)이었고, 오로지 나라의 독립을 위한 일념으로 중국 상하이 뤼쉰 공원에서 일본왕 생일 및 승전기념 축하 식장에 폭탄을 던져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 대장 등 많은 요인을 숨지게 해 일본 사람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윤봉길 의사도 아호는 매헌(梅軒)이었습니다.

3월의 푸른 하늘에 활짝피었다가 떨어질 매화는 조국의 독립을 거부한 아니, 독립투사들을 잡아들이는데 앞장선 친일파에 비해서 독립을 위해 한 몸 바친 수많은 애국지사들의 서글픈 눈물로 비쳐진다면 저 혼자만의 생각일까요!

아시겠지만 매화를 따 빚은 술은 매화주라고 합니다, 열매인 매실을 넣어 만든 술은 매실주가 되며, 흰 죽이 다 쑤어질 무렵 깨끗이 씻은 꽃잎을 넣어서 먹으면 그 향기는 일품입니다. 또한 꽃잎을 말려 두었다가 끓여 마시는 매화차는 향기를 아는 이들이 즐기는 음식이죠.

꽃을 보기 위해 만든 품종을 보면 꽃의 빛깔에 따라 백매, 홍매, 청매로 나누고 꽃잎의 수가 많으면 만첩매, 가지가 늘어지면 수양매가 됩니다.

특히 꽃을 즐기는 이들은 그 어느 품종보다도 흰 홑겹 꽃을 일찍 피우고 향기가 짙다 하여 귀히 여기는데, 그 중에서도 자색이 들어 있지 않은 녹두색 꽃받침 잎을 가진 ‘청약소판’ 이란 품종을 가장 높이 칩니다. 또 열매에 중심을 두고 만든 것은 소매실, 소첩, 청축 등 수업이 많습니다.

우리 나라에도 전해 내려온 재래 품종이 여럿있었으나 많은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서 사라져 갔고 일본에서 여러 품종으로 바뀌어 거꾸로 들여와 우리 땅에 매실나무를 심고 있다는 사실이 못내 안타깝기만 합니다. 해마다 3월 중순이면 남쪽 지방 섬진강가 백운산 자락에 매화밭이 유난스레 마음을 끈다고 하지만 그 매화는 우리 토종이 아니므로 정겹지도 않거니와 덕지덕지 붙어 있는 매화를 보노라면 자존심 상하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듯 종류를 가리지 않더라도 백가지 꽃의 우두머리라는 뜻으로 ‘백화괴(百花魁)’, 모든 꽃의 어머니란 뜻의 ‘화형(花兄)’ 이라고도 부릅니다. 또한 봄이 오기전 눈이 내릴 때 꽃이 피는 나무를 ‘설중매(雪中梅)’ 라 하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찰 한(寒)자를 써서 한매, 조매 또는 동매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제가 사는 곳에서 조금 떨어진 시골 아닌 시골에 사촌 형님 댁이 있는데 후덕스러운 형수님이 술을 잘 빚습니다. 명절 때나 제사때 그 술맛을 볼 수 있는데 이 참에 매화를 따서 형수님께 갖다 드리고 매화주를 부탁 해보렵니다. 물론 술독에서 술익는 소리 들리면 술 걸러서 서울사는 고향 친구를 불러 함께 제가 눈여겨 봐둔 백화산 자락 소나무와 대나무가 어우러진 ‘송죽바위’ 위에서 “오호라 매화주로구나” 하면서 마시는 것을 생각해 봅니다. 아직은 고향땅의 흙냄새는 살아 있으니 하는 말이지요.

매화가 필 때까지 기다리는 마음과 술독에 술익는 마음까지 기억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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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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