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필서예가 림성만
문필서예가 림성만

봄날 눈감았다가 뜨면 그 봄 다 지나가겠네 봄날은 그렇게 짧은것인지 세상살이 아쉬운 건 어쩔 수 없지만 피었던 꽃 지면 얼마나 또 기다려야 할까 봄, 그렇게 기다린 봄인데 난 지금 또다른 봄을 기다리는걸까 하긴 그렇게 사는거라네 봄날 눈감았다가 뜨면 그 봄 다 지나겠네

 

나는 불꽃처럼, 거짓없이 욕심버리고 초연했던가. 가족에게 짐은 되지 않았는지, 주위사람들한테 사랑스런 마음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나는 왜 서예술(書藝術)에 모든 것을 쏟는가. ‘예술이 늘 어려울 필요는 없다. 그 것은 우리 모두가 자유롭게 바라보며 살펴보고 발전하면서 관계 맺는 것만이 전부인 작품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라고 생각해 보지만 실질적으로는 요원하다.

한파는 차가운 고요를 데려온다. 추위가 셀수록 단단해지는 고요 속, 눈이라도 쌓이면 ‘아무도 다가서지 못하는 날개’를 펴듯 산들도 한층 준엄해진다는 느낌인데, 한낮마저‘은빛의 차디찬’ ‘빙벽’을 둘러치니 인내의 심금을 재듯 깊어지는 나날이다. 그 너머에서 더 ‘준엄한 적요’로 빛나는 설산(雪山), 범접 못할 세계의 비의(秘儀)인 양 높이 솟은 설산은 그래서 더 푸른 매혹이다. ‘신의 영역’ 이라면서도 인간의 발로 아니 온몸으로 굳이 오르는 사람들은 그 미답(美踏)에 혼이 팔린 것일까. 영화 ‘히말라야’의 관객들도 생을 걸어야만 잠시 서본다는 설산의 높디 높은 고독에 더매료당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설산은 ‘절필의 막막함’ 과도 닮았다. ‘백지(白紙)’ 만 준엄하게 펄럭이는! 얼마전 설과 대보름이 지났으니 새해도 그런 백지 위에 새로 쓰는 기분으로 삼가고 마주해보며, 새로 써나갈 새 약속들을 돌에 음각하듯 숙이며 또 이 글을 적어본다. 그리고 기억하는 건, 변해야 한다는 것인데 정말 변할것인가. 년 초마다 다짐해 보지만 쉽지 않은 설움이다. 하지만 그것이 가야할 인생이라지만, 그럼에도 사랑으로 나를 극복해야겠다.

여태껏 살아온면서 가슴속에 회한을 명주실 뽑아내듯 하나씩 끄집어내고 싶은 마음이지만 그것조차도 아련함인가. 그리고 푸른 연기로 피어났던 사랑스러운 시작이었지만, 어느새 나이(?)가 불꽃 사그라지듯 그렇게 다가오는 느낌은 왜일까? 아무리 기억하려 해도 떠오로지 않는 것들이 분명 있다. 가슴 저 깊은 곳에 넣어 두었던 것이 이다지도 아픈걸까. 북쪽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눈발보다도 내 몸은 시리지만 뇌리에선 철저하게 절제라고 말하는데, 그렇다고 쉽게 버릴수도 없음이어라.

아- 또 한 해가 새롭게 시작인데, 나의 고고한 철학(?)은 왜 이리 어려운건지. 한시(漢詩) 한 작품이라도 꼼꼼하게 후세에 남겨두고 싶어서 생각은 저만치 앞서지만 내 마음이 느슨한건가. 밤새워 첫사랑의 추억처럼 설레이다가 책상앞에 앉아 원고지를 바라보지만 돌아봐도 글 한 줄 이어가기가 왜 이리도 힘겨운건지.

아직까지도 내겐 남겨진 공부가 남아있건만 요원한건가? 그래 설레이는 첫사랑처럼 공부를 하면서 그 것을 또 그리워하고 기억해야지. 아직 영원한 공부를 꿈꾸는데, 남들은 어쩌면 미친짓이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그 것이 숙명이라면 어찌할건가. 보잘 것 없는 나의 푸른 공간, 그래도 궁전으로 생각하면 고마운거다. 돌아오라 더 젊었을 때 열정적으로 공부했던 그 느낌으로 더 기다리지 않도록, 현실을 도피하지 않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가 아니고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뒷날 곰곰히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남아있기에 희망은 있는 것이다.

남이 보기에는 예쁜 조각이 많지 않아도, 지금은 슬픔의 조각을 꿰매는 순간일지라도 우리의 인생은 그렇게 기쁘고 슬프며 예쁘고 못난 조각들이 모여서 채워지고 있다. 가끔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 조각을 꿰매면서 왜 이렇게 삶이 불공평하냐며 우울해할지도 모르고, 또 가끔은 다른 사람이 가진 예쁜 조각을 시기하며 내가 가진 조각을 몰래 내버리고 싶은 유혹에 시달리지도 모른다. 하지만 삶의 조각보가 완성되어갈 때쯤이면 알게 되겠지. 한 땀 한 땀 한 조각 꿰매던 모든 순간이 진정 소중하다는 것을.

나무는 보고 있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온다는 것을 나무는 알고 있는데, 하얀 눈송이가 나무 등 뒤에 숨어 있는 것을 나무는 모른 채 바라보고 있다. 큰 나무를 등지고 봄바람을 피한 겨울은 숨을 가쁘게 쉬고, 겨우내 내린 눈도 나무도 서로 의지한 채 계절이 자연에 순응할 줄 아는 것처럼 인간도 자연에 맞서 싸울 것이 아니라 머리 숙일 줄 알아야 한다. 수백 수천 년을 살아온 신화적 존재인 나무도 흙냄새, 들풀 향기 타고 날아온 봄바람을 막아줄 순 없으리라. 겨울은 물이 흘러가듯 봄바람에 밀려난다. 이젠 큰 나무 뒤까지 봄이 바짝 다가와 겨울이 숨을 곳은 없고, 벌써 나무 뒤쪽엔 작은 꽃들이 돋아나고 있다.

꽃처럼 사람도 피어날 때가 따로 있듯이, 봄이 눈앞에 있다. 봄의 꽃은 계절이니, 말하면 모든 꽃은 씨앗에서 출발해서 자신에게 맞는 철에 활짝 피는건데, 개나리와 진달래는 봄에 피고, 접시꽃과 초롱꽃은 여름에 만개하며, 가을에는 코스모스와 천일홍이 피고, 동백과 매화는 겨울이 되어서야 꽃망울을 터트린다. 접시꽃이 겨울에 피고 싶다고 그렇게 되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여름에 매화를 보고 싶다고 아무리 닦달해도 매화는 겨울에 핀다.

사람도 마찬가지로 우리 각자에게는 특별한 씨앗이 숨겨져 있는데, 물론 씨앗이 있다고 해서 저절로 싹이 트고 꽃이 피는 건 아니다. 먼저 씨앗을 심고, 물과 적당한 비료를 주어야 하며 또한, 벌레를 막아줘야 하고, 적당한 햇빛도 필요하며, 그래서 새로운 시작인거다.

생각해보자. ‘봄은 그냥 오지않고 혹독한 겨울이 지나가야만 다가온다.’ 이 진리를 모르는 이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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