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갈 줄 알았는데 소원해지고 지나가는 길손인 줄 알았는데 벗이 되더라’ 는 말이 있다. 지나고 보니 세상이 사람이고 사람이 세상인데, 우리는 끊임없이 누군가를 만나고 그 누군가들이 모여 세상이된다. 불가(佛家)에서는 이렇게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맺어지는 것을 인연이라고 말하는데, 내가 보는 인연은 두 가지다.

재미있는 인연과 재미없는 인연. 재미없는 인연에는 학창시절의 은사들, 내 돈 떼먹고 달아나서 고향에도 못오는 후배 김아무개,(선배도 있었지만) 상처와 모멸감 만 안겨 주고 떠난 여자도 있었다. 하지만 재미없는 인연에도 나름 효용은 있지만, 좋은 인연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각인시켜주는데, 재미있는 인연중 가장 재미있는 게 별 이유 없이 밋밋하게 오래가는 인연이 아닐까?

섬은 내게 인연이다. 섬은 외로워 보이지만 사랑은 늘 묵상하는 사람 같기도 하며, 섬은 사랑을 잃고 난 뒤에 통절한 울음 같기도 하며, 섬은 사랑 혹은 기다림의 자세 같기도 하다. 연인이 여기 있다. 섬을 떠나 뭍으로 돌아가야 할 사람이 있고, 그를 다른 곳으로 떠나보낸 뒤 섬에 남아야 하는 사람이 있다. 떠나오는 이는 섬에 이것저것을 두고 떠나온다.

사랑하는이를 바라보던 안경의 애틋한 시선을 놓아두었고, 세상을 노래한 낡은 시집 속 언어들을 놓아두었으며, 궂은비가 내리는 날에 받쳐들 우산을 놓아두었다. 털실로 두툼하게 짠 스웨터도 바람 부는날에 입으라고 놓아두었고, 끌리는 눈빛과 거짓 없이 순수한 고백과 다정했던 날의 생활을 두고 떠나온다. 그리하여 떠나오지 못하는데, 떠나온 사람도 홀로 남은 사람도 섬이 된다. 그러나 사랑을 기억하는 한 섬은 섬이 아니다.

 

가을 찬비 지나가고 나니 훨씬 스산하고 쓸쓸한 데가 많다. 가을바람은 냉담하고 옹색하며, 한 채의 빈집 같다고나 할까. 그러나 가을 바람은 으스스하긴 해도 흐리터분하지는 않으며, 흐린 정신을 오히려 바로 세우게 해주지 않던가. 바람은 서리처럼 흰빛이어서 이처럼 가을이 기울어져 지나가고 나면 나무는 앙상한 가지로 차림차림이 간편해지고, 숲의 살림은 더욱 단출해질 것이다. 그 것이 나무와 숲의 본래 면목이요. 있던 자리인지도 모르겠다. 마치 길을 떠났던 사람이 그 행로를 되짚어 출발지로 다시 돌아오듯이.

이제 서서히 해는 일찍 떨어지고, 가을의 주위는 점점 어두어진다. 행인들은 이리처럼 점점 사나워지는 날씨 속에 있겠지만, 그러나 안온하게 감싸주는 이가 없지만은 않다. 내 바로 맞은편을 지나가는 가을의 얼굴, 전라도 담양골 창평 「삼지내」 마을엔 풀꽃처럼 살아가는 효소 맹인이 살고 있다. 그녀는 아무런 근심 없이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돌담에 갇혀(?)사는 그녀에게도 왜 아픔이 없었을까.

그녀의 날카로운 손톱엔 커다란 칼날같은 아픔이 숨겨져 있는데 화장기 없이 푸석거리는 머릿결이지만 알고보면 그녀는 순수함 그 자체이고, 예민해보여도 내겐 아무 이유없이 다정함이다. 사실 그녀는 칠십을 넘게 살아왔어도 결코 쉽게 살아가지 않았기에 나로서는 고마움인데, 10년 전, 불의의 사고로 한 쪽 다리가 보기 흉해 보이지만 그것 조차도 건강한 훈장이 아니던가. 하지만 그녀를 보면 짠하면서도 정말 미안한 마음이다. 여행길에 만난 인연이지만 항상 그대로인 것이 수사가 아닌 진정으로 나그네를 대해주는 그 마음이 얼마나 고마운지. 하여, 어찌 그녀를 잊을수 있겠는가.

 

가을 구름처럼 둥둥 바람 드는 마음을 도처에서 마주친다. ‘바람은 어쩌자고 자꾸와서 흔드나’ 높푸른 바람이 여기저기서 흔들리는 가슴을 싣고 물들어가는 단풍 사이를 연일 지나가는데, 가을은 ‘남자의 계절 이라고들 하지만 이 가을날’ 흔들리는 게 남자뿐이랴. 아마 여자들도 날마다 새 바람을 볼 것이다. 그뿐만인가 먼 데를 한참씩 바라보기도 한다.

가을이면 그렇게들 간절해지는 것일까? 놓치고 온 것만 아니라 바람을 따라나서면 무엇이든 만날 것만 같은 마음도 더해지나 보다. 그런 날 ‘눈부시되 쓸쓸’한 어느 바닷가, ‘갈대밭 사이 황금비단’ 앞이면 더할 나위 없으리라. 그런 바닷가에서 그리는 ‘이십대, 어느 한 시절 마음이 와서 울던 곳’! 옛 마음 다시 펴서 깊이 젖고 싶은 도무지 어찌 할 수 없는 가을날!

연초록 풀잎의 계절은 가고 황금빛 물결의 시대가 왔는가. 그건 아니다. 왜 그러냐구, 그대는 묻겠지. 그건 눈에 보이는 세계일 뿐 환상적 풍경은 어디에서도 계절을 초월하는 것이다. 그건 그 안에 숨어 있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때문이고 아직도 우리가 그들을 찾지 못했고 잊지 못했기 때문인다.

 

푸른 풀밭과 아이들을 생각하면 알록달록한 종다리, 뭉게 구름과 푸른 하늘을 서로가 통하는 동화적 세계다. 그 나라에는 파란 풀잎속에 들어가 꽁꽁 숨어 있는 아이들이 있는데, 어른 들은 하루빨리 그 아이를 찾아서 그들의 초롱초롱 눈망울에 눈을 뜨고, 그들의 노랫소리로 귀를 씻어 다시 가슴을 뛰게 해야 한다. 그래서 다시 어린아이로 태어나야 한다.

어린이는 어른들의 스승이라 하고, 시심(詩心)은 동심(童心)이라 했다. 가을이 와서 황금물결 일 때면 풀밭의 아이들은 잠을 자는데, 풀밭이 그들에게 비단 이불을 깔아주고 햇살에 덮어준 것이다. 그들은 내년에 봄이 오고 다시 종다리 높이 날아 풀잎 피어날 때면 잠에서 깨어날 것인데, 알록달록 종다리 잡아 그 작은 새의 가슴에서 흰 구름 꺼내 뭉게뭉게 하늘로 날릴 것이다. 그리고 풀잎 속에 들어가 숨어 있을 것이다.

그렇게 아이들은 언제나 이 세상을 동화의 나라로 만들어 줄 것이다. 그대 삶의 즐거움이 있는가? 시간은 흘러 푸르던 나뭇잎들도 어느덧 붉게 물들어 외로운 이들의 어깨 위로 떨어져 내린다. 시간은 멈추지 않고 앞으로 달려가고 있는데, 사람들은 지나간 날들을 뒤돌아보며 아쉬워 하겠지. 자신의 뜻대로 살아지지 않는 것이 삶이다. 거기서 삶의 희노애락이 뭉게뭉게 피어 오르는데, 그래서 삶은 더욱 신비롭고 숭고하다.

 

앙드레 지드의 ‘지상의 양식’은 삶의 비망록이자 영혼의 여행기이다. 젊을 때 아프리카를 여행한 그는 자연 속에서 강렬한 생명력을 경험하고 자신을 구속해 온 도덕적 종교적 윤리와 관습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그는‘욕망과 본능만이 우리의 길잡이’ 라고 말하며 ‘모든 허위와 가식을 벗어던지고 맨몸으로 삶을 마주하라’ 고 한다.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말고 부단한 유동성을 뚫고 영원한 열정을 가지고 자신을 던지는 자만이 행복을 얻을 수 있으며, 행복은 오직 순간 속에 있다’ 고 노래한다.

젊은이들의 영혼을 갉아먹는 것은 순응이다. 기존의 것에 대한 비판적 성찰 없이 답습하고 따르는 것은 정체와 퇴보로 이어질 수 있으며, 인간이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점은 스스로의 삶을 자율적으로 프로그래밍할 수 있다는 점이다. 기존의 가치나 제도에 안주하거나 무비판적으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에 따라 주어진 시스템을 바꾸어 나가는 것이며, 삶의 주인으로 살아갈 때 시계는 우리에게 새롭게 다가 올 것이며, 행복은 자신의 길을 가는 사람에게만 손을 잡아주는데, 그러므로 긍정적 에너지로 삶을 향유해야 한다.

SNS 기사보내기
태안미래
저작권자 © 태안미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