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 그러지 않았을까. 남자는 아내가 닭 한 마리를 사오라는 ‘부탁’을 했고, 단골 닭집에 들러 “알아서 줘~” 했고, 그러다 오는 길에 ‘친구’를 만났고, 그냥 헤어질 수 없었기에. 마침 태안장에 나온 아는 트럭장사가 눈앞에 있었고, “내 닭 요기다 잠깐 맡기구 놀다 올테니께 잘 봐” 했고, 트럭장사는 “한 시간 지나두 안 오면 내가 잡아 먹을거여” 했고, 남자는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머릿고기 잘하기로 소문난 막걸리집으로 팽~. 그러지 않았을까.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약주니, 탁주니 하는 가름은 술을 빚는 재료에 따른 것이 아니라 술을 거르는 방법에 따른 것이다. 걸죽한 술덧에서 노릇하면서 맑은 물을 받아 내는 것이 요즘 약주라 불리는 청주다. 술독 가운데에 대나무살로 촘촘하게 만든 「용수」를 박아 놓으면 그 속에 청주가 고이게 되는데, 더 맑은 청주를 얻어내기 위해 술덧을 모두 자루에 담아 약틀에 짜내리기도 한다. 이 청주를 약주라고 부르는 것은 나라에서 내린 금주령을 피해 술을 빚기 위해 권세가 있는 집안 사람들이 “몸이 나빠 약으로 마시려고 담근 것” 이라고 둘러댄 데서 유래된 것이다. 요즘말로 표현하면 「꼼수」 인 건데 해악이 묻어난다. 그 땐 그랬다.

 

「막걸리」 아버지가 세상과 이별하기까지 즐겨 드시던 술은 막걸리였다. 60년 전 태안양조장에서 한 되에 13원 이었는데, 세 대접쯤 되었다. 그 때는 밀로 막걸리를 빚었는데, 지금은 쌀막걸리로 변한 것이 다르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지금은 막걸리가 대세인데, 값도 저렴하고 천연식품이기 때문에 나도 가끔 즐기는 편이다. 다만 맛이 조금씩 차이가 있는데, 막걸리 색은 우윳빛이 돌아도 되고, 한지색이 돌아도 되지만, 검고 칙칙한 빛이들면 안된다. 쌀로만 빚으면 흰빛이 도는데, 밀누룩을 쓴 막걸리는 한지색이 들지만 물론 재료에 따라 색깔이 얼마간 달라지는데, 그건 시간과 정성으로 나눌 수 있다.

막걸리 향은 좀 더 민감하고 까다로운 것이 사실이다. 지역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기에 하는 말인데, 태안엔 소원 막걸리와 원북 막걸리, 안면막걸리로 나뉘는데 각자 독특한 풍미가 있다. 하여, 막걸리 잔을 약간 흔들어 코 끝에 대어보면 시큼한 향이 나는 것을 나는 가장 경계한다. 술독을 잘 씻지 않거나, 여과기를 청결하게 하지 않아서 나는 냄새, 물 젖은 판자나 행주 냄새 따위가 나서는 곤란하다. 여름을 잘못넘긴 누룩에서 나는 퀴퀴한 냄새도 경계해야 되는데, 누룩의 잡내를 없애려고 밤이슬에 적셨다 햇볕에 말리는 법제를 했던 옛 사람들의 노고가 이해되는 부분이다. 균을 파종한 흩임 누룩이든, 단단하게 뭉친 떡 누룩이든 향을 어떻게 순화시키느냐에 따라 우열이 가려지기 때문이다.

술을 다시 흔들어 술 속에 숨은 향을 불러내본다. 그 향을 포획하려고 민감하게 코에 기를 모아보는데, 이런 때 차라리 아무런 향이 느껴지지 않는, 그래서 마치 숨죽이고 있는 술이 무난하다는 생각도 해본다. 하지만 뜻밖의 향이 올라오기를 희망해보기도 하지만, 과자향도 아니고, 누룽지향도 아니고 화장기 묻은 손으로 빚은 술향도 아니다. 오래도록 그 향을 맞고 싶은 은은한 연꽃향이 올라오기를 희망하는데, 또 하나는 메론향이 느껴지는 것도 있고 배향이 올라오는 것도 있다. 부드러운 향은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데, 언제나 그런 술을 만나게 되기를 희망한다면 욕심일까?

하지만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은 맛이다. 맛이 좋으면 모든 걸 용서하게 되고, 술을 한 모금 머금어보는데, 혓바닥을 가볍게 간질이는 정도의 탄산기가 느껴진다면, 청량하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그러나 사이다처럼 극성스로운 탄산기는 너무 요란하여 다른 맛을 들뜨게 하며, 까끌까끌한 입자가 느껴지는 것은 뭐 크게 중요하지 않다. 다만 현미밥이냐 백미밥이냐 정도의 차이로 여기겠다. 그렇다해도 너무 거칠어 목에 걸리는 정도는 곤란하지 않을까.

단맛이 먼저 혀 끝에 얹혀 오지 않았다면 한다. 단맛은 술맛을 너무 가볍게 만들고, 너무 미끈하게 만든다. 너무 달면 화장 진한 얼굴을 보는 것 같고, 때로 가면을 쓰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단맛은 감지 되지 않는 정도이며, 그저 부드러움을 주는 정도에서 머물렀으면 좋겠다. 약간의 신맛은 술이 퍽퍽하지 않다는 느낌을 주기 위해서 필요하지만, 신맛이 침샘을 분주하게 만들 정도면 곤란하다는 말이다.

침샘이 어딘지 모르게, 신맛이 입 안에서 돌아 다녔으면 좋겠다. 쓴맛은 그래도 조금 참아줄만하다. 알코올이 본디 쓰기 때문에, 쓴맛이 도는 것을 싫어할 이유가 없다. 다만 그 쓴맛이 혼자 돌아다니지 않고, 단맛이나 구수한 맛과 손잡고 돌아다녔으면 한다. 쓴맛이 혀 안쪽에 살짝 얹혔다가 감쪽같이 사라졌으면, 여우별처럼 스쳐지나갔으면 좋겠다.

막걸리는 대개가 알코올 6%라 혀를 압박하거나 입천장을 찌르는 듯한 느낌이 없다. 부드럽다. 쌀이나 밀가루를 재료로 삼으니 얼마든지 부드러워질 수 있다. 부드럽지만 싱겁거나 물맛이 쳐서는 곤란하다. 텁텁하진 않지만, 얼마간의 무게감이 느껴졌으면 좋겠고, 입 안에서 아무것도 걸리지 않는 부드럽고 순수한 맛이있으면 좋겠다. 내 몸속으로 들어와 그대로 혈관을 타고 가도 좋을 막걸리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막걸리를 기대하면서 오늘도 행복감을 느껴본다.

 

「술안주」 봄날엔 피붙이가 다가와도 거절할만큼 꼬막무침이 최고인데, 살진 그 맛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쑥 넣어 맑은 탕으로 끓여낸 도다리는 어떠한가. 오롯하게 솟아오른 나무두릅순 살짝 데쳐서 초고추장에 찍어먹는 맛이란, 싱싱한 풀을 뜯어먹고 자란 살진 한우의 육전과 육회의 맛, 내용물이 꽉찬 꽃게 찜도 좋고 양념무침, 간장게장과 된장을 풀어 한소끔 끓인 꽃게탕, 보리가 누렇게 익어갈 때 최고의 맛을 내는 우럭매운탕, 이거면 봄날 술안주로 끝이다.

여름날 아무런 양념없이 굵은 소금만 송송 뿌려 구워낸 붕장어의 참맛이란, 삼복더위에 민어회, 맑은탕은 두 말할 것 없이 정점이다. 튼실하게 논 배미에서 자란 우렁을 삶아 초무침한 그 맛을 안다면, 어디 그뿐인가. 장마철에 파전은 막걸리와 최고의 궁합이다. 하나 더, 감자를 밑에 깔고 살진 병어를 졸여낸 그 맛은 한여름밤의 알뜰함이다.

가을엔 통통하게 살오른 갯펄낙지가 최고인데, 연포탕도 좋지만 매콤한 볶음도 일품이다. 어디 그 뿐인가. 돌돌마른 호롱이 그 맛 아는 사람만 알텐데, 귀한 돔베기는 어린 상어를 말하는건데, 만나기가 쉽지 않지만, 반쯤 말린 것을 쩌서 먹는 방법이 있는데, 쫀득한 식감을 아는 사람만 안다. 가을 대표음식을 하나 더 말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왕새우인데, 싱싱하면 회로도 좋겠지만 소금 바침에 구워 먹으면 그 맛은 가히 환상적이다.

겨울 우리 지방에선 간재미 무침이 최고인데, 그 것 말고도 새조개는 어떤가. 살짝 데쳐서 먹고 그 국물에 라면발 넣어 겉절이 김치와 먹는 호사스런 맛이란, 신김치 송송 썰어넣고 끓이다가 물메기 넣은 시원한 그 맛은 탄성이 절로 나오는데, 미나리와 대가리를 떼어낸 콩나물을 넣은 아귀찜은 그 독특함에 스러진다. 개인적으로 나는 반쯤 말려서 조리한 아귀찜이 맛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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