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숭아」 우리의 손끝은 언제나 파리한 떨림이었다. 아무런 욕심없이 평화를 기다리는데, 대지의 뜨거운 입김. 온몸으로 받아내면서도 작은 몸짓으로 버텨내는 숭고한 네 모습에 감탄이 있을 뿐, 무슨 말을 더 보태겠는가. 칠십 오 년전 우리 민초는 한몸이 되어 부둥켜 끌어안고 설움과 압박의 굴레에서 비로소 자유의 몸이 되지 않았던가. 그 때도 담장 밑에서 웅크린 채 곱게 핀 네 모습에 우린 숨죽인 채 울다 웃었지.

꽃잎도 보이지 않던 암울했던 그 시절, 민초의 형제가 되어 우리와 함께 했던 누이의 손톱을 예쁘게 물들여내던 너. 아래 꽃잎 하나 둘 져도 다시 피어나던 꿋꿋한 민중의 들불처럼 영원한 봉숭아여. 빼앗겼던 봄날 지나고 여름 다가와 뜨거운 물결속에 더덩실 함께 춤추고 꽃이 만발한 수려한 이 아름다운 강산에 우리 모두 희망의 등불을 들고 나아가야지. 문화의 꽃이 만발한 더 큰 대한민국을 위하여.(1945년 8월 15일)

 

「강은 새벽이다」 새벽 강가 안개는 자욱한 흰 벽이다. 어릴 적 그렇게도 넓었던 초등학교 운동장과 키 컸던 포플러 나무와 깊었던 냇·강과 물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산 너머 곱게 피었던 연분홍 참꽃은 지금 왜 보이지 않을까. 신비로웠던 머릿카락 긴 소녀의 투명한 시계는 지금도 가는지. 그림처럼 추억은 왜 아련하게 벽에 그리 쉽게 그려지는지. 새벽 강물은 아직도 수줍은 얼굴의 면경인데, 물은 거칠어도 왜 깊은건지 흐르는 물에 비치는 소년은 왜 그렇게도 또렸한건지 깊이도 없는 물에 다리는 왜 떨리는지 나는 왜 혼자 있는지 그림자처럼 지금 나는 왜 이리도 쉽게 드러나는지.

새벽 강을 건너는 흔들리는 외나무 다리는 처절한 외로움이다. 소녀가 있는데 잊었던 소녀가 업혀 있는데 소녀의 온기로 강은 붉은데 소년의 먼 소망이 발밑으로 되살아 흐르고 있는데 내 꿈은 아직 굳은데, 외나무 다리처럼 가슴은 왜 이리도 떨리는지 강은 아직도 새벽이다. 새벽 강물도 세월도 흐르는 것, 슬퍼 말아야 하건만 나는 아직도 조급한건지 천정에 매달린 시퍼런 곰팡이 벽죽으로 내려올 때 새벽 강가 안개는 아직도 자욱한 흰 벽이다.

 

「침묵」 어제가 작아 보이면‘성장(成長)’한 것이고 어제가 ‘유치(幼稚)’해 보이면 ‘성숙(成熟)’한 것이다. 하여 ‘자신(自身)’을 돌아보는 ‘성찰(省察)’은 ‘사고(私考)’의 ‘성장통(成長通)’ 이다.

현대인들은 소통을 강요당하고 있다. 강박적으로 말과 글을 쏟아낼 것을 요구받아 설화와 필화가 난무하는데 이때, 제대로 침묵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입을 닫는 것으로 충분치 않으며 입안의 혀를 다스릴 줄 아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침묵을 허물지 말아야 할 인생의 모든 길목에서 단호함을 유지하는 것은 깊은 숙고와 밝은 혜안을 통해서만 가능한데, 바로 그렇기에 현인들은 이렇게 말했다. “말을 배우려면 인간에게 다가가야 하지만 어떻게 침묵해야 하는지를 깨치려면 신을 따라야 한다.”

숨쉬는 것은, 숨쉬고 산다는 것은 단언하면 행복이다. 거치른 광야를 걸어 보았는가. 그것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숨쉬는 것이 아니다. 산다는 것 쉽지 않은 것을 알면서도 그 삶을 이어가는 것은 우리들의 몫이거늘 행복을 앞에두고 기억한다면 우린 지금 행복에 겨운거지만, 다른 행복이 있는지 묻는다면 또 다른 괴로움일거다. 숨쉬고 사는 것은 그래도 행복인데, 이 행복(?) 혼자서 누려야 할까. 참 인생인 것을 모르고 살아가는 것.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왜 방황하는지. 우린 언젠가 한줌의 흙으로 돌아가지만 아직 할 일이 얼마나 많이 남았는가. 가만히 기억하면서 삶이라는 노랫속에서 숨쉬고 사는 것, 숨쉬고 산다는 것은 단언하면 행복이다.

 

「삼박골 원추리꽃」 그땐 그랬다. 내가 어릴 때 어머니 치맛자락을 붙잡고 다닐때는, 그땐 그랬다. 모든게 만발한 꽃이였고 예쁜(?) 어머니는 항상 젊음일줄 알았는데, 이젠 백발에, 생각해보면 그땐 그랬다. 어머니는 풍만한 젓가슴을 가진 젊음이었는데, 지나고 보니 삶은 아쉬움 그리고 그리움, 돌이켜보면 그땐 그랬다. 계절은 바뀌는 것, 어찌 세월을 탓하랴.

한여름에 피어난 야생화인 원추리가 곱기만하다. 일찍 단친 더위와 긴 장마에 꽃들도 저의 철을 버리는가. 망우초(忘憂草)라고 하는 원추리는 달큰한게 봄나물로도 인기여서 어머니는 어린 순을 잘라 데쳐서 무치거나 된장국 끓이기 좋아서 봄이면 돋기가 무섭게 뜯기곤 했는데, 그래도 여름이면 뒤란 장독대 그늘에 주황빛 꽃을 곱게 피웠으니 봉숭화며 백일홍처럼 언니의 꽃으로 내 가슴에 깊이 새겨져 있다.

삼박골(백화산 중상턱 냉천동 상류)은 ‘숨 가쁜 언덕’ 거기만 밟아도 백화산을 다 오른 듯 가슴이 탁 트이고 뿌듯한데, 어느 여름 삼박골에서 맞딱뜨린 원추리 꽃의 청초한 진경은 결코 잊을 수가 없다. ‘후드득 여우비에도 가슴 쿵쿵’ 떨고 있을 삼박골 원추리꽃 ‘하마,하마 기다림에 한 시절 설레’ 던 꽃들은 지금도, 설레며 피어있겠지. ‘입술이 바싹바싹 타들어가도’ 그 품에 기른 기다림은 버리지 않았을텐데, 그것은 다름 아닌 백화산이고, 삼박골이니!

 

「반딧불」 가난을 딛고 학문에 열중한 사람으로 흔히 진나라의 차윤과 손강을 든다. 차윤은 여름밤에 반딧불에 의지해 책을 읽었고, 손강은 겨울밤에 눈빛 아래서 글공부를 했다. 훗날 차윤은 상서랑에 올랐고 손강은 어사대부가 되었으니, 이로부터 형설지공(螢雪之功)이라는 유명한 고사성어가 탄생한다. 시골에서 자란 사람에게 반딧불은 잊을 수 없는 추억인데, 초가지붕 위로 날아오르던 황홀한 불빛을 두고 이봉순 시인은 ‘어느 천사의 넋이기로 한밤 기다려 별과 함께 피뇨’ 라고 노래했다. 그것은 또한 도깨비불에 얽힌 수많은 전설을 통해 소년들의 동심을 비추던 정겨운 불빛이기도 하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육상 생물 중 유일하게 스스로 빛을 내는 반딧불은 예부터 영험스러운 곤충으로 통했다. 중국에선 병귀와 액귀를 막아준다 했고, 우리 나라에서도 칠석날 반딧불을 잡아 고약을 만들면 백발이 흑발로 바뀐다고 했다. 누에 치는 밤에 반딧불을 풀면 쥐가 얼씬거리지 못한다 했고, 푸른 반딧불이 집 안에 날아들면 조만간 길한 일이 생긴다고도 했다.

반딧불은 깨끗함의 상징이기도 하다 오직 일급수에서만 서식하고 물이 조금이라도 탁해지면 곧바로 자취를 감춰버린다. 주요 먹이인 다슬기와 민달팽이 역시 오염된 곳에서는 살아갈 수 없는데, 산업화 이후 개체수가 급감하면서 한때 개똥벌레라 불릴 만큼 지천이던 반딧불은 어느덧 전라북도 무주 일대의 서식지까지도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이젠 고약을 만들 만큼 반딧불이 흔하지도 않고, 설령 눈에 띄더라도 함부로 잡을 수도 없는 세상이 되었지만, 한국인에게 반딧불은 여전히 환경과 문화를 연결하는 소중한 정서적 상징물이다. 잔치처럼 여름밤을 수놓으며 견우직녀의 밤길을 밝혀주던 그 신비한 군무(群舞)를 언제쯤 다시 구경할 수 있을까.

SNS 기사보내기
태안미래
저작권자 © 태안미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