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렇지 않은 듯 살아간다는 것, 삶이란 그런거라고 말들하지만 송곳처럼 뾰족한 날선 세상살이, 그 길은 험난한 예정이어라. 아무도 모르는 처절한 아픔, 삶속에 고뇌의 숙명이 숨어있어도 또다른 길 기웃거린 것이 아니었기에 남은 꿈 꺽을수 없어 살아가는거다. 인생의 큰 배로 항해할 때 거친 파도와 모진 바람 이겨내고, 수평선 너머 그곳에 도달하기까지 험난한 것을 왜 일찍 몰랐을까. 그래도 삶에 가치는 분명한 것. 웃지도 웃을수도 없는 세상살이지만 아무도 모르는 가녀린 삶. 견뎌야지 슬픔 뒤엔 분명 기쁨 있기에.

팔월은 풀과 나무들이 물씬물씬 숨을 쉬며 자라는 달이다. 타오르는 태양 속에 산과 들이 다시 젊어지는 짙푸른 생명의 달이며, 뭉게구름 뭉게뭉게 피어오르면 매미가 분수처럼 쏴아 울어대고 아이들은 푸른 나무 그늘을 찾아 모여드는데, 길 위에 솟은 옥수수밭에서는 농부들이 뿌린 땀방울이 알알이 옥수수 알로 맺혀간다. 버드나무 그늘에서 삶은 감자를 먹고, 복숭아를 따며 하늘을 쳐다보는 풍요로운 팔월, 그리고 장마와 가뭄과 태풍을 견디고 이겨내야 하는 푸르기만한 팔월 이런 계절이 있기에 풍성한 가을의 결실이 있는 것이리라. ‘땀과 노래 싱싱한 열매와 푸르름’ 속에 살아갈 태양의 계절. 팔월은 우리들 가슴을 뜨겁게 한다.

 

사랑을 만나러 갈 때에는 들떠 두근거리지만 떠나올 적에는 다시 만날 기약이 없어 서운하고 아쉽다. 그러나 만나면 언젠가는 헤어지게 되어 있고, 헤어진 사람은 후일에 반드시 돌아온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어쩌면 이별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으며, 가슴에서 슬픔의 무게를 조금이나마 덜어내 소소하게 여길 수 있을 것 같다.

이별의 기억에서도 한 송이 연꽃의 미묘한 향기, 이 생애 다음에 올 내생(來生)도 대낮처럼 훤히 보일 것 같다. 살랑살랑 불어가는 바람의 보법(步法)을 보시라.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의 밀어도 저 바람이 다 실어가리니. 연꽃은 진흙 속에 있지만 항상 깨끗함을 잃지 않는다. 모든 인연이 풍경을 뎅그렁, 뎅그렁, 흔들고 가는 마음으로 지금 칠월을 보내고 팔월을 맞는다.

 

능소화가 도처에서 눈길을 잡아끈다. 능소화는 먹구름 다 쏟은 하늘에 태양이 작열할 때면 더 농염해지는 여름의 꽃인데, 진한 주황의 꽃빛에 나무를 휘어 감고 오르는 습성 때문일까. 능소화는 묘한 관능을 풍긴다. 그래서 그림자도 주황일밖에 없는 팔월 초입의 능소화에 자꾸만 눈이 간다. 더위에 지쳐가는 한여름, 비라도 내리면 저항이 불가능하게 낮잠의 유혹이 끈끈해지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능소화는 ‘고양이가 발을 얹’ 는 허공을 온몸으로 짚어가며 또 뜨겁게 타오른다.

마당에 멍석을 깔고 누워 어머니가 만들어 주셨던 밀국(칼국수)을 먹고 별을 보며 개구리 소리를 듣던 유년 시절 여름밤이 생각난다. 생풀 냄새 향긋한 모깃불 사이로 반딧불처럼 반짝이던 수많은 별들, 밤늦게까지 개구리가 울어대던 여름밤의 풍경이 새삼 그리운 추억으로 다가오는 건 나이를 먹었다는 것일까.

동생들과 머리를 나란히 하고 누워 개구리 소리를 듣는 단란한 가족의 모습은 이제 기억으로만 남아 있지만, 개구리들도 할아버지, 아버지, 막둥이처럼 한 가족일 거다. 별이 가득한 이 밤, 흩어져 사는 가족이 생각나는데, 손에 닿을 듯 별이 빛나는 여름밤. 가족 간의 따뜻한 정이 묻어나는 정감 넘치는 풍경이 아련한 향수를 자아낸다.

 

그 곳 바닷가 모래밭에는 바닷새들이 빽빽하게 모여 앉아 있다. 그 앉아 있는 일렬횡대의 무게 때문에 팽팽하던 푸른 수평선이 아래로 처져 있고, 그리고 바닷새는 사방으로 허공에 흩어져 날아간다. 마치 파도의 흰 포말처럼, 어느새 바다는 인간을 만나러 재빠르게 움직여 오고 바다는 인간의 세계 가까이에서 해안에서 퍼지르고 앉아 있다. 다시 일어나 먼 수평선 쪽으로 돌아간다. 이때 인간의 세계는 “벌떼 같은 사람” 이 사는, 소란하고 더렵혀진 세계인데, 인간을 만난 바다는 난파선처럼 떠밀려 간다. 인간의 세계가 “물 밑바닥에 밀리는 흰 모래알“처럼 눈부시고 깨끗할 순 없을까.

이 곳과 그 곳의 밤 풍경은 확연하게 다르다. 낮보다 더 분주한게 이 곳의 밤이라면, 그 곳은 해가 떨어지면서 잠잠해지는데, 그런 곳에서 살다 보니 외롭지 않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 순간, 며칠 못 견딜 것 같다는 식인데, 그런 이유일까. 큰 맘 먹고 전원생활을 택했다가도 외로움 때문에 도시로 귀환하는 사례가 많았다. 내겐 그런 것과는 관계 없지만 아쉬운 한 가지는 분위기 있는 심야 식당이 없다는 것이다. 늦은 시각 모든 일을 마친 사람들이 한 잔 생각이 간절할 때가 있을텐데, 그냥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읍내에 들러보지만 마땅한 곳이 없기 때문이다.

그 마을에서 새벽녘 뽀얗게 감기는 안개를 헤치고 좁은 들길을 걷는 것은 나만의 덤이다. 동네 사람들이 알뜰하게 키워낸 풋것들이 싱그럽기만 하고 일찍 잠에서 깨어난 촌노의 얼굴도 환하기만 하다. 마을길을 돌아보면서 행복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산다는 것은 별거 아닌데, 아침밥을 먹고 차를 우려내어 음악소리와 함께 하루를 시작하는 시간을 제일 좋아하는데, 마당 곁 돌담위에 피어난 능소화 꽃대에 작은 새 한 마리가 날아와 마주해준다.

저 새는 인간이 무섭지도 않고 친구처럼 생각하는지. 그럼에도 보잘 것 없는 우리 인간은 욕심으로만 살아왔으니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거다. 작은 기쁨에도 감사할 줄 모르는 것이 인간이라지만, 지금 이 고요가 감사하기만 하다. 그것도 인생의 무게를 조금 버리니.

마을에 새벽까지 문을 여는 작은 식당을 만들어 바다가 가까운 논두렁을 옆에 낀 2차선 도로변에 나무와 종이로 만든 입간판으로 불을 밝혀본다. 자그마한 백열전구 빛이지만 사방이 온통 캄캄하니 유난히 눈에 들어올 것이다. 누런한지에 주(酒)라고 써 붙여놓으니 운치있게 보일것이고. 테이블은 달랑 2개. 여덟 명쯤 앉을 수 있게 준비하고, 문밖에 나무 테이블 2개를 더 준비 해본다. 한쪽 벽에는 LP레코드를 가지런하게, 다른 한쪽에는 책을 언제라도 읽을 수 있도록 준비 하는거다. 텃밭에는 여러 가지 채소를 키워내고.

메뉴도 일정하지 않고 정체 모를 음식만 아니라면 준비도 완벽(?)한 그런 공간인데, 한쪽 귀퉁이에 있는 오디오 플레이어에서는 잔잔한 음악이 흐르는거다. 비어있는 벽에는 작은 그림과, 서예 작품을 걸어놓는데, 작품 제목은 세심(洗心)‘마음을 씻다’ 로 설명되는데, 그랬으면 좋겠다. 밤이 깊어지니 근처 사람들과 지나가던 여행객이 들어오기 시작하고, 조그만 식당에 이장님만 오면 마을잔치가 벌어질 태세인데, 풀 냄새 벌레 소리와 뒤섞여 막걸리 잔을 부딪치다 보니 시끌벅적한 도시가 더 외로웠던 것 같다.

 

※앞으로 내가 예쁘지도 않고 마음이 넉넉한 여인과 꿈꾸는 ‘음악이 흐르는 심야 식당’ 의 모습을 상상해 본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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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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