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나라들이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창궐로 인해 곤욕을 치르는 가운데, 다행히도 우리 사회는 이제 막 큰 고비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힘, 국민의 힘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인류에게 치명적 위협을 가한 대개의 전염병이 그런 것처럼 언제 어느 곳에서 2차 파동이 들이닥칠지 알 수 없는 탓에 우리는 앞으로도 긴 시간을 ‘살얼음판’ 위에서 보내야 합니다.

 

이제 세상은, 코로나 바이러스 대유행 ‘이전’과 ‘이후’로 나뉠 것입니다. 각계 전문가들 역시 인류는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에서 살아갈 것이라고 입을 모읍니다. 산업구조와 소비행태의 변화는 물론, 건강과 의료·생태환경 등 우리네 삶의 질서를 둘러싼 모든 영역에서 거대한 전환이 닥쳐올 것이라는 진단입니다.

 

1929년부터 10년 간 지속된 세계 대공황의 캄캄한 터널을 빠져나오면서, 미국은 비로소 사회보장제도를 도입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참화를 씻어내면서, 영국은 비로소 국가보건의료서비스를 시작했습니다. 대공황과 전쟁이라는 엄혹한 위기의 시간을 겪고 난 뒤 이들 나라는 ‘새로운 선택’을 함으로써 극적인 변화의 계기를 마련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는 어떤 선택을 함으로써 코로나 사태를 보다 나은 미래를 향한 ‘전환의 계기’로 삼을 수 있을까요? 국가 단위의 큰 그림은 차치하고라도, 그렇다면 우리 태안군 앞에는 어떤 선택지가 열릴까요? 어떤 절차와 과정을 통해 최선의 선택에 다다를 것이며, 그 선택이 이끌어낼 변화의 방향은 또 무엇일까요?

 

상념의 타래가 꼬리를 물면서 뒤척이는 시간이 길어지는 것은 우리 앞에 놓인 이런 질문들 때문입니다. 취임 이후 처음으로 언론 기고를 통해 군민 여러분을 뵙고자 한 뜻도 이 질문들에 대한 저 나름의 생각을 전하는 가운데 성찰적 문제의식을 공유하면서 함께 그 답을 모색해 보기 위함입니다.

 

홍가시나무와 격세지감

 

저는 새로운 선택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새로운 상상력이 필요하다고 믿습니다. 사례 한가지를 소개할까 합니다.

 

지금 태안읍 시내를 관통하는 동백로에는 신록의 계절에 홀로 붉어 찬란한 홍가시나무가 그 자태를 한껏 뽐내고 있습니다. 그 맵시에 넋을 빼앗겨 탄성을 삼키던 사람들은 셀카 앞에서 다양한 표정을 짓습니다. 신호등에 멈춰선 차량에선 차창 밖으로 휴대폰 카메라가 연신 고개를 내밉니다. 몇년 뒤면 파리 샹젤리제 거리에 버금가는 풍경을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는 달뜬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화사하게 터져나옵니다.

 

이런 풍경들을 마주할 때면, 격세지감에 휩싸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난해 화단형 중앙분리대를 설치하고 그곳에 홍가시나무를 심겠다고 했을 때 들려오던 비난과 반대의 목소리가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잘 알다시피, 한 지역의 정주여건은 지역주민의 삶의 만족도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정주여건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 가운데 도로를 비롯한 교통환경은 그 중추라 할 만하지요. 이같은 인식 위에서 태안군은 아름다운 거리 조성과 교통문화 개선이라는 두마리 토끼를 잡기 위한 방안으로 화단형 중앙분리대를 계획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수종 선정 등을 위한 각계 의견수렴 과정에서 수목·조경 전문가들을 초빙해 구성한 자문단은, 방풍·방진효과가 탁월하여 가로수로도 제격일 뿐더러 색다른 볼거리를 제공할 수 있다면서 홍가시나무를 강력히 추천했습니다. 저 역시 그 의견에 적극 동의하였는 바, 전국 어디를 가나 마주치는 고만고만한 가로수종 선택의 틀을 과감히 벗어던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경제성 면에서도 동백나무나 반송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양호했습니다.

이같은 의견에 귀 기울이고 마음을 여니, 비로소 홍가시나무의 생태적 특성이 계절에 따라 연출할 찬란한 거리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상록수인 홍가시나무는 남부지방에서 생울타리용으로 널리 알려져 인기가 많았는데, 이를 가로화단에 심기로 한 것은 태안군이 처음이었을 겁니다.

미세한 관점의 변화가 새로운 시야를 열어준 셈입니다. 고정관념의 끈을 살짝 놓아버리자 새로운 상상력이 펼쳐진 셈입니다.

 

행정불신의 산파, ‘습속’과 ‘고정관념’

 

도시 공간구조의 재구성을 위한 새로운 상상력과 새로운 시도는, 처음에는 기대했던 만큼의 환영을 받지 못했습니다. 중앙분리대가 교통흐름에 지장을 초래할 것이라는 반대에 부딪혔던 것이지요. 이 의견들을 분석해 보니, 엉뚱하게도 익숙한 습관들이 가로막히는 것에 대한 불편한 심기가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불법 유턴을 비롯한 법규 위반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우리 지역의 고질적 습속이 반대 목소리 안에 똬리를 틀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런 이유라면 물러설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중앙분리대 설치 후 교통사고와 법규 위반사례가 사라짐으로써 사람과 도시의 품격이 높아지고 있다는 점에서 이 판단의 적실성은 입증된 셈입니다.

수종의 부적절성을 힐난하던 목소리에는 가로수종에 대한 고정관념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이들 고정관념은 바로 그 고정관념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볼썽사나운 말들을 무책임하게 생산·유포하며 행정의 투명성에 의혹을 제기하는 모양새로까지 비약해 갔습니다. 이같은 비난의 눈초리에는 오래 묵은 고정관념의 완고함과 거기서 자라난 확증편향이 빚어낸 행정불신이 숨어 있었던 것이지요. 그런 시각이라면 더더욱 타협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쳇바퀴에서 벗어날 ‘용기’

 

그렇게 1년이 지나고, 다시 봄이 왔습니다. 코로나 사태가 드리운 그림자 속에서 힘겨워 하는 사람들에게 위로를 건네듯, 홍가시나무는 홀로 만발했습니다. 청정태안을 지키기 위해 애쓴 모든 분들께 보내는 박수갈채인 양, 홍가시나무는 왁자지껄 흔들립니다. 습속과 고정관념의 굴레에서 벗어나 새로운 면모를 추구하고자 했던 우리의 작은 시도가 태안의 중심지 풍경을 이렇게 탈바꿈시켰습니다. 시의적절하게도, 위로의 풍경이고 치유의 풍경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릇, 새로운 질서를 세우기 위해서는 새로운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기성 문법을 버릴 줄 아는 모험심, 창조적 지혜에 대한 갈구,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미감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주민은 주민 대로, 공직자는 공직자 대로, 정치인은 또 정치인 대로 화석화한 발상의 쳇바퀴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새로운 상상력으로 채색한 문제의식을 구체화하고 이를 실행에 옮기는 용기를 지녀야 합니다. 그렇게, 코로나 이후의 태안을 예비해 가자고, 6만여 군민과 7백여 공직자들께 손 내밉니다.

 

“코로나는 코리아를 이길 수 없습니다!”

 

태안은 대한민국을 응원합니다. 우리는 긍지 높은 태안군민입니다. 기회가 닿는다면, 또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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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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