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물도 잠든 새벽은 고요함의 극치다

 

살면서 꽃길로만 가려는게 아닙니다. 더딘 걸음이지만 욕심 내려놓고 묵묵히 가야하는 것을 알고 있기에 희망의 불씨는 아직 살아남아 마음속에 남은 거친 것을 다듬어내어 부드러움을 이끌어내야 합니다. 보이는 것 어루만지는 것은 환한 느낌인데, 더디지만 분명한 목표가 있기에 참고 견디면서 걸어가는거지요.

사랑, 지긋지긋한 사랑이었다해도 춤사위는 쉽게 사라지지 않고 아직 춤추고 싶은 건 건강한 몸인데, 바람따와 훌쩍 떠날 수 있고 비 흠뻑 맞아도 웃을 수 있는 건 가난해도 거짓없는 삶이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지나간 시절은 거칠고 험난했지만, 이제 다시 새로운 느낌을 기억한다면 살아온 것은 세월의 곰삭음이고, 그러기에 살면서 꽃길로만 가려는게 아닙니다.

어느 여인의 모습을 가만히 눈감고 기억해보면 지금보다 더 젊었을 때 과연 그 여인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이 재산이란걸 느끼지만, 떠나려 준비하는 가을 단풍은 봄꽃보다 화려함입니다. 가을이 스치면 왜 마음이 아프고 시린건지.

그 향기 그 눈빛은 왜 또 그리운걸까요. 그 여인 지금 흰눈 내리는 겨울을 기다리고 있을지. 쓰라린 바람이 불어오고 지나갑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막을 수 없는 가을빛, 그 여인이 서럽게 그리워 지는 건 어찌할지. 단 한 번 스쳤을 뿐인데 운명으로 받아들이기엔 그 여인에겐 냉혹한 형벌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조금은 도도하고 까칠해 보이지만 그 속사정 끝없는 미궁속으로 빠져 버리고 무엇보다 당당함이 앞서는데, 그 여인에게 이끌리는 마력은 어디에서 나온것인지. 어쩌면 혼자라는 내 안의 그 것이 아닐까요. 가녀린 그 여인의 삶에 노래는 누가 뭐래도 주관적 고통을 물리친 소유자. 인생살이 홍시처럼 농익은 가을 빛을 닮았습니다.

인간은 혼자의 시간을 두려워 합니다. 혼자 있어도 무언가 행위를 하려고 움직이지만, 그러나 항상 혼자가 되며 사람들과 같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도 혼자입니다. 인생은 홀로 걸어가는 긴 여행길이며 내면의 침묵과 고독의 시간을 함께 걷는 것이며, 각자 목적과 뜻을 갖고 찾아다니는 여행길이어도 결국은 내면으로 향하는 겁니다.

여행은 밖을 헤매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본래마음을 찾아 걷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며 많은 여행을 떠나 다녀도 항상 그자리이며, 도시 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함께 더불어 살아갑니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의식하고 혹은 상대편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한채 혼자 있거나 사람들과 함께 있어도 고독한 시간에 멈추어 있습니다.

일상적 삶속에서 우연히 만나는 사람들, 그 중에는 마치 한 장의 사진을 보는 듯 착각에 빠지게 하는 장면들이 있습니다. 아래로 향한 시선 속에서 도시의 표정을 바라보는데, 우리가 살아가는 이 도시는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바쁜 일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거리를 지날 때, 내 시선으로 보는 광고들은 화려하게 겉모양을 치장하며 시각을 자극하는데, 그런 것을 스쳐 지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사람들이 엮어내는 삶의 표정들을 내 속 깊이 담아봅니다.

저녁때가 다 되어서야 마침내 나는 나를 믿기 시작했습니다. 잊지 말아야 할 일이 있을때마다 몸에 하나씩 문신을 새겨 넣듯 아련한 기억 하나. 여행을 다녀오면 후유증이 퍽 길게 내 삶의 언저리를 맴돕니다. 몸은 돌아왔는데 아직도 무엇은 돌아오지 못했다는 의미인데, 현재의 삶 일부분이 아직 그 곳에 남아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기억해보면 지금의 나는 아직도 시공간의 불일치 속에 놓여있다고 말해야 할까요.

그렇기 때문에 그 후유증을 얻기 위해 나는 어딘가로 끝없이 떠나고 돌아오지 않았던건 아닌지, 하여 그 어딘가에 남겨두고 온 터럭 같이 미미해진 기억과 삶의 일부분이 때론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삶을 지탱해준다고 나는 믿습니다.

바람의 집은, 숲일 것이며,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다는 그 존재가 나뭇잎을 흔듭니다. 언덕을 넘어서면 굽이굽이 흐르는 강물 어디선가 우르르 물새들이 몰려오는 소리가 들려 제 그림자를 안고 얕은 물줄기를 들여다보며 먹이를 찾느라 분주한 긴다리의 새떼들, 물의 사랑이 숙연하게 노을을 껴안고 있었습니다. 단풍 물드는 오솔길에서 소망의 노래와 마주하는데, 가슴 저민 상처를 달래는 또 다른 떨림. 조금씩 아늑한 수림의 안식으로 천천히 따라가다 패엽경(貝葉經)처럼 개옷나무잎에 빼곳하게 써내려간 편지글이 가볍게 휘날리는 것을 목도합니다.

첼리스트 로스트로포비치(mstislav RostroPoVich)가 연주한 슈만 ‘첼로협주곡 A단조 작품 129’가 초저녁 어둠에 방황하다 내 가슴을 훑고, 박혔습니다. 화면은 스침처럼 찰나에 감응하는 경쾌한 속도감으로도 광대한 우주를 껴안는데, 선과 무채색 하모니가 빚는 시원의 대지와 바다... 그 안으로 나의 숨결이 녹아든 무아의 몰입은 자연으로의 회귀와 다름 아닙니다. 억겁 흔적 켜켜이 쌓인 퇴적 숲을 부유하는 저 씨앗이 육과 혼이 쓰는 날것 시편에 내려앉아 발아를 꿈꿉니다.

그 것이 전부일까요. 노을은, 이 가을 노을은 정말 화려합니다. 그 빛으로 빨려들어가는 가을. 나는 지금 무엇으로 사는가 되뇌어보지만 가슴 열고 바라보는 것을 알고 계시는지. 바람따라 천천히 움직여 그 곳으로 달려가지만 가을은 여유가 없습니다. 내가 지금 늙어가는걸까요. 마음은 아직 그대로인데, 잘 익은 모과향처럼 그렇게 늙어가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보지만, 그게 쉬운 일은 아니기에 음악 소리를 몸속에 채곡채곡 재워두면서 이 가을을 맞이하고 보내렵니다.

꽃은 피었다가 피안의 세계로 돌아 가겠지만 산사의 작은 소리는 다만 적막의 넓이와 깊이를 나타내주는 고요의 척도일 뿐인데, 한여름밤의 별에도 서늘함 있었겠지만 왜 그 별엔 이별이 있는걸까요. 산사에는 고요함 뿐인데, 하여 우린 끝없는 번뇌 속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미물도 잠든 산사는 고요뿐인데...

 

 

문필서예가 림성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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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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