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1. 한반도 한민족 아니 북으로 뻗쳐 가면 고구려였다. 송화강 저 요하를 거쳐 대련 끝까지 백두산, 압록강, 두만강에서 금강을 거쳐 남해 뛰어 저 탐라 섬의 한라산 까지.

먼 오랜 조선족 우리들의 조상, 우리들의 첫 민족은 예맥이었다. ‘개마’ 혹은 ‘검’, ‘고마’ 였다. 1만 년 전 3만 년 전 혹은 석기시대 그 무렵 곤륜 이쪽 북방에서 발해만을 끼고, 따사한 땅 한반도에서 서해안까지. 또한 요하에서 송화유역 압록강으로 나와 산맥을 등에 업고 동해안으로 또는 해로를 통해 산동에서 파도를 헤쳐 서해를 건너 억센 골격, 날랜 걸음 두 눈 번뜩이며, 박혁거세, 주몽, 왕건의 나라 군사였을까. 원효, 대각국사, 휴정의 나라 불도였을까. 설총, 퇴계, 다산의 나라 학문이었을까, 아락 다보탑, 청자, 백자의 나라 예술이었을까, 균여, 송강, 단원, 추사의 나라 예술이었을까. 동학, 3.1운동, 4.19 나라 혁명이었을까. 5.16, 12.12, 5.17, 나라 구테타였을까.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이명박정부, 박근혜정부, 민주화였을까.

옛날에 오랜 상고 어디서인지 겨레씨 태어나 넘어지며, 일어서며, 동방을 향해 모여들어 서로 도와 나라를 이뤄 하나의 겨레로 핏줄을 이뤄 정착했거니 고원을 사막을 빙원을 산악을 바다를 강을 건너 한반도 고운터전 햇살의 나라 오래 여기 겨레살며 꿈 부풀렸거니.

산에서는 사냥 들에서는 농사 바다에서는 바다의 보배 고기를 잡으며 길쌈해서 옷 입고 나무베어 집 짓고 아들딸들 그대로 자손 이어가며 서로 돕고 이웃 노인들에겐 공경하고 하늘의 신은 높이 섬겨 생명에는 자비, 인간에게는 사랑을, 세상 모두는 평화를, 겨레의 내일은 번성을, 땀 흘리며 일하며 예술을 빚고 깊은 이치는 학문으로 닦고 밝히며 하늘의 뜻과 사람의 도리를 찾아 왔었다.

때로는 그랬었다. 아니 오래오래를 그래왔다. 비록 옛날에 옛날부터 한반도는 한민족의 락토이기를, 한민족은 하나의 나라로 단일하기를 원해 왔지만, 그러나 우리는 오랜 세월을 방황했었다. 오늘 우리 한겨레가 하나의 나라로 되기까지는 한반도 이 락토는 피로 젖은 강산, 서로 갈려 여러 나라로 찢기고 합쳐졌다. 동의 나라는 서를 치고, 서의 나라는 동을 쳤다. 북의 나라는 남을 치고, 남의 나라는 또 북을 치고, 서로 싸워 피 흘리며 동족상잔을, 피는 흘러서 강이 되었다.

참으로 그랬다. 우리 겨레가 참으로 하나 영원한 겨레가 되기 위해 일어났다가는 쓰러지고, 하나의 땅에 한의 겨레로 모두어 지기까지 겨레끼리 서로 싸워 희생을 하는 이 숙명, 저 백제가 일어나 마한을, 신라가 일어나 가야를, 가야가 일어나 백제를 쳤다. 그리하여 다시 신라는 또 고려를, 후백제는 신라를, 고려는 후백제를, 고려는 또 신라를 쳤다. 그리하여 마침내 통일신라는 천 년 만에 고려에 의해서 망했고, 전성 고려는 또 조선에 의해 하루아침에 무너졌다.

아, 길고도 쓰라렸던 동족, 서로의 오랜 다툼 피로 물든 역사, 오늘 또 다시 견주어 보아 마음 어지러워라, 한민족 우리의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우리 겨레를 이 땅에 내어 삶을 누리게 한 대대로 이어 면면하게 역사를 이루게 한 무엇이었을까? 하늘이 감추신 그 영원한 뜻이 무엇이었을까?

어느 때는 빼앗기고 어느 때는 찾으며 백골로 산을 쌓고 피로는 강을 이뤄 빛을 주고 어둠을, 금·은을 주고 쓰레기는 동녀를 처녀를, 값진 문물을 약탈당하고 그러면서도 슬기와 끈기 풋풋한 정기를 잃지 않고 당하면서 견디어 내고 막으면서 시달려 온 하나의 목적 민족사명 무엇이어야 하나, 빛내온 문화 그 영원한 지향 무엇이어야 하나.

백두, 금강, 한라의 정기는 겨레, 우리 정기 아침 동해 새파란 파도는 우리의 정열이 아니냐. 평화와 자유 민주평등의 겨레 이상, 하나의 나라 우리나라로의 열한 염원을, 남과 북 저들 왜(倭)와 오랑캐는 햇살지어 왔다. 언제나 저들은 우리 이 비원을 뭉개뜨리어 왔다. 고구려 때는 수·당란, 조선 때는 왜·호란, 일제강점 35년 같은 그 왜의 1·4 침공 30만 그 같은 오랑캐의 잊혀 질수도 지워 버릴 수도 잊을 수도 없음이며, 오늘의 정세는 또 얼마나 다를지 생각해 보아야 할 일이여...

 

◈Ⅱ

1. 그랬었다. 저 왜란 임진침공 7년 대 수난, 왕정은 썩어가고 정파당쟁은 극성하고 나라의 내일 백성과 오늘을 살피는 바 없이 가렴주구 무사안일, 거짓 태평이나 구가하던 저 선조 25년 4월 13일, 드디어 왜가 군사를 일으켜 침공해 왔다. 도웅수길 그 왜의 야망이 조선 침략을 개시했다. 왜병 총 21만, 그 중의 수군이 9천, 분승한 병선이 350척, 그 중의 제 1진 1만 8천에게 그날로 우리 부산이 함락됐다. 제 2진 2만 2천, 경주와 영천으로 쳐들어 왔고, 제 3진 1만 1천이 창원을 점령, 성주 개령을 거쳐 질풍과 같이 추풍령으로 치달았다. 다시 제 4진 그리고 5진이 4만, 6진이 1만 5천, 7진 3만, 8진 1만이 차례로 상륙, 수군 1만이 후방과 해상에서 진을 쳤었다. 우리나라는 이 때 영의정에 이산해, 좌·우의정에 류성룡, 이양원, 사·병조에 이원익, 김응재, 어쩌랴! 우유부단 무방비 당쟁의 과열한 무진 눈물이, 왜의 침공을 오판하여 너무도 뜻밖의 날벼락, 앉아서 그대로 당했다.

이날 부산에서는 첨사 정발, 동래에서는 부사 송상현이 고군으로 싸우다 충절을 다하고 분사했고, 내륙 각 주(州)현(縣)은 무인지경, 왜의 무기는 조총. 우리의 그것은 활과 칼뿐, 제대로 한 번 싸워도 못보고 차례로 차례로 무너졌다. 서울에서 안 것이 17일. 이 때에 조정은 크게 놀라 조령을 막기 위해 순변사 이일을, 죽령으로는 좌방어사 성응길을, 추풍령으로는 우방어사 조경을, 그리고 조방장에 변기, 도순변사에 신립 장군을 세웠다. 그러나 이일은 상주에서, 신립은 충주에서 패하여 신립은 투신자살, 조경의 군병은 추풍령에서 패했다.

왕도 서울의 패보는 뒤를 잇고, 적의 침공은 가까워 오고, 수성대장 이양원, 순검사 박충간, 도원수 전명원, 서울 수비는 말 뿐이었다. 나 하나 왕의 몸 밖에 수도가 다 무엇인가 백성이 다 무엇인가! 백금을 몰래 사들이고 메투리를 몰래 사들이고 서울 분출을 준비하는 왕의 밀모가 알려지자 백성들이 먼저 달아나기 시작 민심은 흔들려 흉흉했다.

충주의 패보가 들어오고 적의 진격이 박두했다. 29일 밤, 소낙비가 쫙쫙 쏟아지고 비바람 캄캄, 어둠속에 왕 선조는 궁성을 떠났다. 울며 뒹굴며 궁녀들은 따를 뿐, 백궁은 이미 달아나고, 이산해, 류성룡 등 왕을 따르는 자 겨우 1백 명 안팎, 왕이 떠나자 서울에는 난민들이 일어났다. 불을 질렀고 노비문서를 불사르며 창고의 재물을 파헤쳤다. 경복궁을 불지르고 창덕궁 창경궁을 모조리 태웠다. 역대에 이어진 값진 보물과 그릇, 홍문 춘추관의 서적과 실록, 전조 사초 승정원일기가 한줌의 재로 돌아갔다. 일본 군인은 채 입성도 하기 전에 왕도는 이미 불바다였다.

창황한 쫓김의 길, 왕은 불에 타는 도성을 뒤로 돌아보며, 북쪽으로 밤길을 재촉 비 맞고 굶주리고 실정을 꾸짖는 민중의 아우성 속에 개성에 겨우 도착했다. 김공양은 달아나고 이산해를 문책 왕은 친히 스스로의 죄책을 교서로 내려 의병을 팔도에 모집했다. 다음날 20일 왜장 소서는 동대문, 가등청정이 남대문으로, 뒤이어 흑전 우끼다 소조천이 드디어 차례로 서울에 무혈입성, 이 때 도원사 김명원 유도대장 이양원 등은 화살 하나 쏘아보지 못하고 도망쳐 달아났다.

그리하여 소서가 다시 평안도로 가등이 함경도로 흑전이 황해도, 소조천은 전라도, 모리는 경상도, 복도는 충청도로, 적은 이리떼 설치 듯 짓밟았다. 임진년 수비도 무너지고 개성을 떠난 선조는 평양에 겨우 당도했다. 무엇을 할 수 있었던가! 명나라에의 청병 이덕형을 청원사로 구원의 청병을 결정했다. 선조가 다시 의주로 향해 떠나고 윤두수, 김명원이 지키던 평양이 또 함락했다. 평양의 함락을 정주에서 듣고, 왕은 또 특사를 급파, 이제는 명나라의 내정, 우리나라를 그대로 영영 명나라의 한 영토로 편입해줄 것을 간청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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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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