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나는 어떤 난관에 부딪쳐서 체념상태에 주저앉으면 문득 어린 시절을 회상하고 분발하곤 한다. 그리하여 젊은 날의 숱한 방황과 좌절을 거쳐 지금까지도 서예를 통해서 길을 구하고 서예를 나의 심장과 함께 고동치게 하다가 그 속에 나를 불살라 버린 외톨박이의 길을 따라가고 있다.

만일 내가 유별난 취미와 남다른 특기를 가졌고 돈이 많았다면 서예공부를 하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떠한 동기에서건 간에 50여년의 세월을 소모하여 서예 창작에만 몰두해 왔다. 때문에 나는 유명해지리라는 생각을 버리고 가장 고독하게, 가장 팔리지 않는 서예작품을 내놓을 것이다.

“만일 당신 사후에 당신의 시(詩)가 세 편만 남아도 자신을 위대한 시인으로 알고 시를 쓰십시오. 그리고 생전에는 절대로 유명해질 생각은 말고 시를 쓰십시오.” 라고 에즈라 파운드는 말했다. 결국 예술의 길은 끊임없이 새로운 것에 도전할 때만 희열과 진실을 쟁취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서예에 탐닉하고 창작을 시도하게 된 것도 이러한 연유에서 비롯되었으리라. 창작이란 근본적으로 침묵 속에서의 고독한 작업이지만, 일단 발표된 작품은 소란스런 외침이나 선동적인 웅변보다도 훨씬 크고 넓은 감동과 영향력을 가질 수도 있다. 남들이 모두 침묵할 때 종이를 통하여 먹을 빌려 증언하고,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이 서예로 감상하는 것은 침묵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나는 지금까지 전시 중에는 서예작품을 얼마의 돈과 바꾸었으나 전시 때가 아니면 작품에 돈을 결부한 적이 없다. 그렇다해도 전시로 인해 내가 정말 작품을 팔았던가? 나는 서글픔에 짓눌려 자문해 본다. 50여 년 동안 붓자루를 움켜쥐고 있으면서도 한 번도 그들의 삶에서 인간의 진실을 캐낼 수 있다는 것을 회의한 적이 없었다.

서예야말로 세상 어느 기호나 신호보다도 근원적인 인간의 진실을 발언한다고 느꼈다. 나의 문방사보(文房四寶)는 똑같은 빈핍의 희생자라는 점에서 나의 내부가 지니고 있던 또 다른 나, 소외 받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그것은 나의 머리, 등이나 손처럼 나 라는 존재의 구성 분자였으며 너무나 가슴 속 깊이 밀려와 돌이킬 수도 고칠 수도 없는 일이 되었다.

나는 위험이 사라진 뒤에 짖어대는 개처럼, 혹은 느끼지도 못하는 어른을 상대로 벌주고 있다고 생각하는 어린 아이처럼 그렇게 하기는 싫다. 그것이 상식에 대한 도전이고, 경고를 위한 맹목적 열정이며, 교차로가 보일 때마다 도망치고 싶어하는 산초 곁의 무모한 돈키호테라고 해도 좋다. 나 자신은 행동이 필요했고, 그들에게 대해 이끌리는 피할 수 없는 마음의 요구에 따랐으며, 내 생각대로 세상을 살피고 내 방식대로 시대의 어둠과 맞섰을 뿐이다.

나는 최근 “인생이 끝나고 삶이 죽음으로 변화하는 그 순간에 당신은 무엇을 생각할 것인가? 그리고 그때 당신은 인생을 어떻게 추억할 것인가?” 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었다. 솔직히 나는 오랫동안 생각에 골똘했다. 문방사보에 있어 그들과 나는 섞여진 직물 같은 것이었으며 그들을 제외한 어떤 제스처로도 살고 싶지 않았다. 나는 모든 중량의 힘으로 그들을 안았고 그리고 그들 속에서 내 마음 속의 빈 곳이 채워지고 안도를 느꼈음을 고백한다.

행복은 나를 의혹과 적의의 눈초리로 쏘아보는 사람들 사이로 나의 서예작품은 시위하며 걸어가던 그 치열한 기쁨안에 있었다. 그것은 진하고 따뜻했으며, 나는 그 모든 것들이 내가 죽는 그 순간, 내게 치명적인 패배의 모습으로 돌아오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그들을 향해 언제나 마지막 노력을 했다는 것으로 충분하며, 내가 그들에게 주어야 할 것은 그것이 전부다. 주어야 할 것이 많다는 것은 얻는 것보다 더 나은 일인지도 모르며, 가진 것을 주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을 나는 모른다.

그런데 왜 이 작업에 이다지도 쓰디쓴 잡음과 비난이 일어야 하는가. 엄숙하고(부드럽고) 투쟁적인(거칠고) 묘사는 당연한 예술의 창작임을 알아야 하는데도, 그 부드러움과 강함의 조화에서 투명한 미적 존재로 승화시킴으로써 미를 다시 희망으로 연결시킬 수 있기 때문에 희망이 있는 한 생명도 있을 것이다.

서민의 편에 서겠다는 성의와 의지를 행동을 통해 입증한다는 것은 서예 작품의 생산과 서예계 풍토의 개선이라는 면에서도 바람직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작가는 사회 비판을 붓이라는 도구를 통해서 한정된 공간에서 사회 발전을 위함이 원천인데 이것을 봉쇄해 버리는 것은 커다란 손실이라 하겠다. 어둠을 밝히는 것은 마땅히 서예의 사명이며, 작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오늘의 현실 뒤에 감추어진 역사의 발견, 세계의 발전 법칙을 꿰뚫는 눈이 아닐까.

서예, 그로 인해 나의 존재를 사회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일지도 모른다. 다만 생활이 어렵고 삶의 질곡으로 인해 고통스러우면 고통스러울수록 서예에 대한 나의 집념은 더욱더 강해질 수 있을 것이다. 창조활동은 예술이나 지적 영역뿐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일어날 수 있으며, 창조의 목표는 자신을 바치는 것이고,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다. 굳이 애써 다른 표현은 하지 않으련다.

멀리서 누군가를 부르는 외침 소리가 들려온다. 문득 역류해 오는 세상의 냄새, 나는 지금 눈을 뜨고 어두운 방안에 있는데, 너무도 고요해서 웅웅거리는 듯한 침묵이 느껴진다. 나의 나이든 심장의 고동이 고르게 울리고 있다. 희미하다. 들린다. 살아 있다 아직도. 그러므로 나는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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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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